감각을 깨우는 지적 산책, 한국의 새로운 박물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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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설명문과 유리 진열장’으로 기억되는 박물관의
시대는 이제 끝. 최근 새롭게 문을 연 박물관들은 디자인,
큐레이션, 콘텐츠 면에서 고루한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 지적 탐험과 감성적 휴식을 모두 충족하는
공간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들어선
박물관에서 만나는 고요한 전환의 순간들.
EDITOR IENA
오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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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분 앞, 신라를 사색하다
경주 대릉원 바로 옆, 천년의 역사가 코앞에서 숨 쉬는 ‘고분 명당’에 신생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바로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품은 오아르 미술관이다. 지난 4월 문을 연 오아르 미술관은 경주 출신 컬렉터 김문호 관장이 2005년부터 모아온 소장품 600여 점으로 시작한 사립 미술관으로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1594㎡ 규모의 공간에 한국 전통 예술과 현대미술을 함께 소개한다.
이 미술관의 가장 큰 혁신은 고분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 유현준 건축가는 “어떻게 하면 고분이 미술관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액자 효과’라는 답을 내놨다. 실제로 내부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신라 고분 3개가 창틀 없는 완벽한 프레임 속에 담겨 마치 특별히 큐레이션된 작품처럼 경험된다. 천년의 역사가 현대적 시선으로 재해석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전시 감상 후에 맞는 이색적인 순간도 이곳만의 매력이다. 루프톱에서 바라보는 경주의 전경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단연 카페에서 즐기는 ‘고분멍’ 타임. 차 한 잔과 함께 천년 왕국의 흔적을 바라보는 고즈넉한 시간은 세계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오아르만의 특별한 경험이다.
주소 : 경북 경주시 금성로 260-6
문의 : 054-705-5501
웹사이트 : oar-museum.com
오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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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2만 개의 사운드 캐슬
소리와 건축의 완벽한 만남. 오디움은 세계 최초의 오디오 박물관이자,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인 특별한 공간이다. 세계적 건축가 구마 겐고가 한국에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은 알루미늄 파이프 2만 개로 둘러싸인 독특한 외관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파이프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흩뿌려지는 모습은 마치 소리가 보이는 듯한 신비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런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베르사유 건축상이 뽑은 ‘2025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930~1940년대는 음악사에서 기념비적인 시대였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그때, 오디오 제조사 간의 경쟁은 치열했고, 이들은 단순히 원가 경쟁을 넘어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완벽한 소리를 추구했다. 오디움의 전시실에 들어서면 그 시대의 대형 스피커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광경에 압도된다.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의 ‘라우드 스피커’와 독일 클랑필름의 ‘유로딘 스피커’는 단순한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 청음이 가능한 살아 있는 유산이다. 같은 곡을 두 스피커로 비교해 들어보는 순간은 음향 기기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지하 1층은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흰색 패브릭으로 감싼 라운지 공간으로, CD 1만5000장과 LP 10만 장이 보관된 소리의 도서관이다. 조지 거슈윈의 오페라 아리아 ‘서머타임’을 최상의 음향 시스템으로 감상하며 더위에 지친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청량감을 선사할 듯. 매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만 열리니 사전 예약은 필수다.
주소 : 서울시 서초구 헌릉로8길 6
문의 : 02-574-5175
웹사이트 : audeum.org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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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고요히 기다리는 곳
올해 5월 1일 전관 개관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다가 11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국보 <조선왕조실록>과 보물 <의궤>를 직접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공간이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담은 방대한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대한민국 국보다. ‘조선판 데일리 뉴스’라고 비유하면 적당할까. 왕실의 정치와 외교는 물론 민간의 생활상까지 상세히 기록한 이 문서들은 세계 역사서 중에서도 그 연속성과 정확성에서 독보적 위상을 갖는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오대산사고의 역사부터 실록의 제작 과정, 보관 방법, 그리고 환수까지의 여정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오대산사고본에만 남아 있는 붉은 먹으로 기록한 교정부호는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완성된 조선 기록 문화의 정수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시대에는 현대적 백업 시스템과 유사하게 실록을 여러 부 제작해 전국의 깊은 산사에 분산 보관했는데, 오대산사고는 그중 하나. 전관 개관 첫 여름을 맞아 다양한 특별전과 프로그램이 열리니 잊지 말고 방문하자.
주소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76
문의 : 033-330-7900
웹사이트 : sillok.gogung.go.kr
푸투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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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 내린 예술의 우주선
전통 한옥이 즐비한 북촌 한가운데, 타임머신 같은 미래적 공간이 있다. 라틴어로 ‘미래’를 뜻하는 ‘Futura’에서 이름을 딴 푸투라 서울은 작년 9월 개관 이후 예술 애호가는 물론 트렌디한 공간을 찾는 MZ세대의 필수 방문 코스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미술관도, 갤러리도 아닙니다.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예술 공간이죠.” 구다회 대표의 말처럼, 기존 전시 공간의 틀을 과감히 깬 건물은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자아낸다. 입구에서 느껴지는 한옥의 대청마루 같은 고요함은 곧 놀라운 반전으로 이어진다. 10.8m 높이의 웅장한 천장과 24m 길이의 메인 전시 공간은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듯한 압도적 감각을 선사한다. ‘백개의 시’란 이름이 붙은 이 공간은 하나의 전시를 한 편의 시로 여겨 앞으로 100개의 시를 써 나가겠다는 취지로 설계되었다. 3층 테라스와 옥상정원에서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기와지붕을 바라보며 즐기는 한 잔의 커피는 말 그대로 예술적 휴식을 선사한다.
현재 진행 중인 안소니 맥콜의 아시아 첫 개인전 은 9월 7일까지 열린다. 빛의 조각을 만드는 그의 ‘솔리드 라이트’ 작업은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몰입형 전시다. 하루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니 방문 전 예약은 필수.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61
문의 : 02-3676-1000
웹사이트 : futuraseoul.org
Bregenz: Where Art Meets the Alps
브레겐츠에서 울리는 물 위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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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로 무대가 떠오르면, 고요한 도시 곳곳으로 음악이 울려 퍼진다. 오스트리아 서쪽 끝 콘스탄스 호숫가에 자리한 작은 도시, 브레겐츠의 여름 이야기다. 전 세계 오페라 마니아들을 불러 모으는 알프스 산자락의 이 작은 도시에는 자연과 예술, 일상의 감각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떠들썩한 인파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예술로 충전하는 밀도 높은 시간을 누리고 싶다면, 브레겐츠는 이번 여름 더없이 적합한 여행지다.
EDITOR KIM KAI IMAGES VISIT BREGENZ

한여름 밤, 예술이 현실이 되는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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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서쪽, 포어아를베르크주의 주도 브레겐츠는 매해 여름이면 도시의 규모를 초월하는 대형 예술 축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치유하고자 콘스탄스 호수 위에 배를 띄우며 시작한 수상 오페라, 브레겐츠 페스티벌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어서다. 전후 문화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시작된 페스티벌은 호수 위에 설치된 초대형 수상 무대에서 오페라와 콘서트를 펼치며 매년 약 2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알프스 산기슭 작은 도시로 불러들인다. 브레겐츠에서는 매년 콘스탄스 호수 위에 대형 무대를 설치한다. 무대 디자인과 콘셉트는 달라지지만 웅장한 규모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세트가 알프스 산자락과 호수와 어우러진 압도적 풍경만큼은 변함이 없다. 여름밤이 깊어갈 때쯤 무대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면, 호수의 잔물결과 별빛을 배경으로 세계적 수준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성악가들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아리아는 관객들에게 마치 꿈결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페스티벌은 매년 혹은 2년마다 메인 오페라 작품을 교체하며 고전부터 현대 작품까지 다양한 명작을 무대에 올린다. 최근에는 푸치니의 ‘투란도트’, 베르디의 ‘리골레토’, 비제의 ‘카르멘’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가 대형 세트를 배경으로 공연되어, 7000석이 넘는 객석이 연일 매진 사태를 기록했다. 70회를 맞는 올해 페스티벌에서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로맨틱 오페라 ‘마탄의 사수’ 가 수상 무대에서 공연되며, 페스티벌 하우스에서는 제오르제 에네스쿠의 ‘외디프’를 개막작으로 선보인다. 본 행사는 7월 16일 개막해 8월 17일까지 이어지지만 무대가 완성되어가며 리허설이 한창 진행되는 6월부터 도시는 이미 음악으로 젖어들기 시작한다. 마치 도시 전체가 예술 축제의 리허설 무대가 되는 셈으로 여름 햇살 아래 펼쳐지는 무대 설치 작업과 리허설 소리는 여행자에게만 허락된 조용한 특권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여름으로 들어서는 이 무렵, 호수 위에 마련된 무대와 알프스의 자연과 관객이 모두 하나가 되는 특별한 축제가 지금 시작되고 있다.
소도시의 여백에 스며든 아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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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겐츠의 묘미는 도시가 크지는 않아도 조용한 골목과 목조 구시가지, 작은 전시장, 자연 속에 스며든 환상적인 아트 신, 그리고 세계적 예술가들의 발자취까지, 다층적인 문화 풍경이 공존한다는 데 있다.
사계절 내내 예술이 도시 구석구석에 스민 브레겐츠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어가 설계한 현대미술관,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Kunsthaus Bregenz)다. 외관은 오스트리아의 맑은 하늘과 호숫가의 빛이 스며드는 반투명 유리 파사드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는 완벽한 여백과 풍부한 자연광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었다.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유리와 콘크리트의 여백 속에서 전통 회화부터 설치미술, 퍼포먼스 아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전시가 연중 이어진다. 올라푸르 엘리아손, 제임스 터렐, 애니시 커푸어, 제프 쿤스 같은 거장과 신진 작가들이 경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곳이다.
도심을 걷다 보면 현대 조각품이 공공장소 곳곳에 배치돼 있으며, 시내 서점과 카페에는 다양한 예술 서적이 자연스럽게 꽂혀 있다. 예술이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도시의 분위기는 소도시의 고요함과 만나 독특한 낭만을 형성한다. 이처럼 도시 전반에 예술이 흐르는 브레겐츠는 여행자에게도 충만한 여유를 허락한다. 랜드마크들을 빠르게 순회하는 관광보다는 느리게 걸으며 감상하고, 오래 기억하는 방식이 이 도시에서는 자연스럽다. 예술적 충만함과 일상의 서정이 조화를 이루는 경험, 바로 브레겐츠가 전하는 소도시 예술 여행의 본질이다.
알프스를 품은 브레겐츠의 휴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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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이 열리는 콘스탄스 호수는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지만, 알프스 자락을 두고 이웃한 독일, 스위스와 국경을 나눈다. 오스트리아에 속하는 호수 동쪽 연안에서 축제가 열리면 멀리로 보이는 독일과 스위스 쪽 호수 풍경이 무대의 자연 배경이 되는 식이다. 도시의 한 면은 호수에, 다른 면은 알프스 산자락에서 이어지는 브레겐츠에서는 이 축복받은 지형 조건 덕분에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펜더산(Pf nder)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호수와 알프스의 장엄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알파인 야생 공원과 하이킹 코스가 있어 몸과 맘으로 오롯이 알프스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산 정상의 자전거 로드는 브레겐츠 도심까지 이어진다. 브레겐츠와 인근에는 총 300km에 이르는 자전거 도로망이 평탄하게 연결되어 있어, 알프스 자락과 호수를 넘나드는 자전거 하이킹이 특히 인기 있다. 짙은 숲과 초원, 산자락을 통과하는 하이킹 코스 또한 다양하다.
알프스 자락이지만 넓은 호수 덕분에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고, 여름에는 쾌적해서 브레겐츠는 언제 방문해도 하얗게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호숫가 산책로를 걷기에 적합하다. 특히 호수 전망과 알프스가 어우러지는 풍경을 통창으로 들여오고, 프라이빗 사우나와 자연 채광이 가득한 테라스 라운지 등을 갖춘 디자인 호텔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한다. 호숫가의 오래된 빌라를 개조한 레스토랑, 현대식 아트 호텔, 베란다에서 석양과 호수를 바라보는 스테이까지, 브레겐츠의 숙소는 쉬면서도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여행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덕분에 예술과 자연이 일상의 경계에 머무르는 브레겐츠에서는 머무는 이들의 여름이 조금 더 특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