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에서 현대까지 문명의 멜팅포트, TURKEY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그 영향력을 뻗었던 제국, 오스만 튀르크.
지금 그 땅에는 다양한 문명과 기독교, 이슬람교가 오랜 시간 뒤엉킨 흔적이
남아 있다. 고대 로마의 유적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아피온을 거쳐 히에라폴리스까지, 문명을 거슬러 여행을 떠나보자.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 칼럼리스트)
동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곳, 터키. 특히 실크로드 상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도시 이스탄불은 동서양 문물 교류의 중심점이었다. 고대 히타이트부터 시작해
프리지아, 우라티아, 리디아와 로마 문명,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녹아든 곳이
바로 터키다. 그래서일까,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터키를 두고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옥외 박물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시작은 기원전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통치자 비자스(Byzas)는 오랜 기도 끝에 ‘눈먼 땅에 새 도시를 건설
하라’는 델피 신전의 신탁을 받는다. 신탁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고심하던
비자스는 보스포루스(Bosporus) 해안 맞은편 언덕과 마주친 순간 무릎을
치게 된다.
그곳에는 보스포루스와 마르마라해(Marmara Sea), 에게해(Aegean Sea),
이 세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요새에 절경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눈이
멀어 미처 보지 못했던 언덕에 비자스의 도시 비잔티움이 태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이스탄불의 시작이다.
하지만 도시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서기 330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로마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200년
에는 십자군의 침략을 받고 다시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초토화된다.
그러다가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이 무너진 후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자리를 잡게 된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이스탄불다.
이스탄불은 6세기에 이미 인구가 50만 명, 9세기에는 100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
였다. 지금 인구는 1천200만 명에 달한다. 그리고 해마다 평균 2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든다.
이런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바로 아야 소피아(Aya Sofia)로 세계 4대
교회 건축물 중 하나다. 이 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4세기인데,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플이란 이름으로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번영을 구가
하던 시기였다.
무려 1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5년에 걸쳐 지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기 전까지 약 900년 동안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었으며,
1593년 성 베드로 대성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성당이 건립되었을 당시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fia)인데, 터키사람들은
아야 소피아라고 부른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아야 소피아는 고난을
많이 겪은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군들의 약탈 대상이 됐고,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 성당에서 밀려오는 튀르크 군을 바라보며 화염
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메흐메트 2세는 이스탄불을 점령하고도 성당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다만 1453년
부터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종, 제단 등은 철거됐고 기독교 풍의 모자이크는
회반죽으로 덮었다. 이후 터키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케말 파샤(아타튀르크)가
정교 분리 원칙에 따라 이곳을 박물관으로 바꾸면서 아야 소피아는 고난의 시대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