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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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호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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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C가 제안하는 이달의 신제품과 가장 핫한 아이템을 선보입니다.

1. A r t i s a n a l H e r i t a g e 발끝에서 느껴지는 기품
장인의 테크니컬한 기술력과 퀄리티 높은 다양한 가죽 컬렉션을 선보이는 스위스 명품 브랜드 발리. 1851년 이래 현재까지 슈즈의 디자인, 구조, 제품에 있어서 혁신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발리는 편안한 착용감, 부드러운 터치감, 매끈한 곡선의 실루엣으로 품격 있는 신사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다. 밝은 톤의 그레이 슈트나 네이비 슈트에 어울릴 만한 클래식한 멋의 브라운 컬러 구두와 메탈 장식 포인트로 캐주얼 패션에도 어울릴 오스트리치 가죽의 구두는 기품 있고 세련된 남성 패션의 액센트가 되어줄 것이다.
발리 밝은 브라운 컬러의 송아지 가죽 소재 아우핀크(Aufinc), 이국적인 오스트리치 가죽으로 만들어진 메탈 장식 포인트의 그레이 아즈크리스(Azcris) 모두 가격 미정. 02-542-0385

2. W h i m s i c a l A c c e n t 퓨전 워치의 정수
시계 제조 역사상 처음으로 고무 소재 스트랩과 골드를 결합한 시계를 창안, 퓨전 스타일의 대명사로 불리는 위블로에서 이번 시즌 스타일시한 남녀를 위한 새로운 워치를 선보인다. 위블로만의 파워풀한 이미지와 기술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표 아이콘 빅뱅 라인에서 18K 레드 골드로 이루어진 케이스와 베젤이 클래식함을 더해주는 남성용 빅뱅 카푸치노와 낮과 밤의 드레스 코드에 모두 걸맞는 팜 파탈 룩의 표범 무늬 프린트 여성용 빅뱅 레오파드를 선보인 것. 위블로 빅뱅 라인은 독특한 소재 믹스와 세련된 컬러로 패션 스타일을 시크하게 완성해줄 것이다 .
위블로 중후한 느낌의 케이스와 초콜릿 컬러 러버 스트랩의 조화가 돋보이는 빅뱅 카푸치노, 18K 레드 골드 베젤에 48개의 바게트 장식이 더해진 블랙 러버와 레오파드 진 스트랩의 빅뱅 레오파드. 모두 가격 미정. 02-540-1356

3. O r i e n t a l F e v e r 동양의 신비로움을 담은 홀리데이 컬렉션
파티와 모임이 많은 시즌. 그 누구보다 돋보이고 싶어하는 여성들을 위해 겔랑은 1920년대 자크 겔랑에 의해 창조된 향수 리우(Liu)에서 영감을 받은 크리스마스 컬렉션을 선보인다. 금빛 미스트, 가늘게 연출한 눈, 그리고 매혹적인 붉은 입술 등 이번 컬렉션은 화려하고도 섬세한 동양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이며, 퍼퓸 파우더와 아이 앤 립 팔레트, 일루미 네이팅 파우더로 구성된다.
겔랑 (왼쪽부터) 얼굴에 빛나는 광채를 선사하는 메테오리트 펄드래곤 일루미네이팅 파우더. 30g, 7만 8천원. 바닐라, 아이리스, 우디 노트 향기의 리우 퍼퓸드 쉬머 파우더 페이스 앤 바디. 17.5g, 11만 2천원. 립 컬러 두 가지와 브론즈, 쿠퍼, 화이트의 파우더 제형 아이섀도 세가지를 담은 리우 아이 앤 립 캘리그라피 팔레트. 10.2g, 10만 5천원. 02-3438-9580

4. E x o t i c T o u c h 럭셔리 스타일의 완성
독특한 문양과 화려한 컬러로 특유의 아름다움을 제안하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에트로에서 이번 시즌 토트백과 클러치 두 가지 디자인의 코코 가든 백(COCCO GARDEN BAG) 라인을 선보인다. 골드 자물쇠 디테일과 크로코 프린트가 특징인 이 백은 견고하면서도 부드러운 송아지가죽에 이국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크로코 레더 프린트를 더해 가격대는 합리적이면서도 럭셔리한 느낌을 그대로 전한다. 오리엔탈적인 페이즐리 문양을 양각 처리하여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놓치지 않은 것 또한 특징. 이번 시즌 패션 트렌드인 레트로 스타일을 에지 있게 완성해줄 코코 가든 백은 타임리스 에센셜 아이템으로 주목받고 있다.
에트로 토트백, 클러치 두 가지 디자인을 회갈색, 퍼플, 그린 컬러로 만나볼 수 있는 코코 가든 백. 넉넉한 사이즈로 실용성을 더했다. 토트백 145만원, 클러치 80만원. 02-3018-2363

5. L u x u r i o u s T a s t e 황금빛 맛의 유혹
잔 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기포가 수면까지 한 번에 올라오는 모습이 마치 별이 쏟아지는 느낌을 준다는 샴페인의 예술, 돔페리뇽. 특히 빈티지 한 병을 완성하려면 돔 페리뇽의 화이트와 블랙 포도인 샤르도네와 피아 누아르의 신비스러운 밸런스가 섬세하게 모으고 화합하는 미묘한 작업을 거치는데, 빈티지 2003은 생기 넘치는 미네랄 향을 중심으로 한 강렬한 맛으로 활기찬 느낌을, 로제 빈티지 2000은 순수한 맛의 절정을 보여주며 분위기 있는 이 계절, 럭셔리 샴페인의 정수를 경험하게 해준다.
돔페리뇽 달콤하고 밝은 플로럴 노트와 설탕에 절인 과일과 식물, 스파이스와 감초 뿌리의 진한 향으로 마무리되는 빈티지 2003, 27만원대. 붉은 오렌지빛이 감도는 브론즈 핑크색의 로제 빈티지 2000, 60만원대. 02-2188-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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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나는 화제의 이벤트, 전시, 신상품, 문화 소식등을 소개하는 라이프 스타일 뉴스입니다.

1.S.T. 듀퐁이 선보이는 뉴 라인 2 라이터
프랑스 명품 브랜드 S.T. 듀퐁이 새로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담은 뉴 라인 2 라이터를 선보인다. 새롭게 리뉴얼된 뉴 라인 2 라이터는 각 분야의 전문 장인들의 손길을 거쳐 기존의 다이아몬드 헤드 패턴과 몽파르나스 문양의 수직 라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으며, 대칭적인 곡선 디테일을 활용하여 우아하면서도 남성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디자인을 선보인다. 문의 02-2106-3592

2. 랑방컬렉션, ‘셔츠의 품격’ 출시
랑방컬렉션 셔츠가 론칭 123주년을 맞이해 ‘셔츠의 품격’ 세트 상품을 선보인다. ‘셔츠의 품격’ 세트 상품은 톤 온 톤 배색의 기모 체크 셔츠와 화려하고 세련된 프린트가 가미된 행커치프, 셔츠와 재킷에 포인트가 되는 부토니에로 구성된 3종 세트 상품이다. 신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상품 구성으로 누구나 시크한 셔츠 스타일링을 구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문의 02-2107-6502
3. 쉐르보에서 소개하는 스포츠 언더웨어 컬렉션
쉐르보에서 어떤 기후 상황 속에서도 최상의 움직임과 편안함을 보장해주며, 스포츠 활동에 이상적인 언더웨어 컬렉션을 선보인다. 폴리프로필렌 소재로 마모와 잦은 세탁에도 강하며 색이바래지 않고, 절연 처리를 통해 완벽한 보온성까지 더했다. 또 어깨, 무릎과 같은 포인트 지점에는 정전기 방지 및 분산 효과를 주는 카본 소재를 추가했다. 문의 02-813-9711

4. 르베이지,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
품위 있고 우아한 베이지 제너레이션을 위한 캐릭터 브랜드 르베이지가 한남동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다. 브랜드 콘셉트를 잘 보여주는 심플하면서도 럭셔리한 의류, 액세서리 등 패션 아이템뿐 아니라 폭넓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메종 르베이지 (MAISON LEBEIGE)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실루엣과 럭셔리한 소재,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으로 론칭 첫해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킨 르베이지와 르베이지의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베딩, 가구, 그리고 다양한 소품 등을 제안하는 메종 르베이지가 함께 어우러진 르베이지 플래그십 스토어는 다양한 전시 공간까지 구비되어 있어 문화와 감성을 추구하는 진정한 베이지 제너레이션들에게 새로운 명소를 제공한다. 문의 02-749-5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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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슬리, 11월 사은 행사
시슬리에서는 11월 백화점 행사 기간 동안 45만원 이상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에게 세련된 악어 가죽 패턴의 고급스러운 골드 파우치와 시슬리 베스트 셀링 아이템으로 구성된 여행용 9종 세트(파우치 포함)를 증정한다. 행사 기간은 11월 2일부터 11일까지. 한정 수량으로 전국 백화점 시슬리 매장에서 만날 수 있다. 문의 080-549-0216

6. 더 히스토리 오브 후, ‘명의향 라인’ 출시
궁중 한방 전문 브랜드 더 히스토리 오브 후에서 궁중 어의 처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문제성 피부 고민을 해결해주는 궁중 한방 스페셜 라인 ‘명의향 라인’을 출시한다. 명의향 라인의 주요성분인 ‘후 궁중한방배지’는 정통 한방 포제법인 ‘발아증법’을 응용하여 개발되었다. 명의향 라인은 문제성 피부 고민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비단고, 재연고, 만능고 총 3가지 제품으로 출시한다. 극건조 및 건선 트러블용 초보습 크림인 ‘명의향 비단고’에는 건조 트러블을 개선하는 비단배지를, 피부과 시술 후 빠른 재생 및 회복을 도와주는 크림인 ‘명의향 재연고’에는 십선배지를, 극노화로 인해 저하된 피부 기능 회복을 위한 올인원 만능 크림인 ‘명의향 만능고’에는 팔진배지를 각각 함유해 문제성 피부 고민을 해결 해준다. 문의 080-023-7007

7. 오휘의 프리미엄 크림 ‘더 퍼스트 제너츄어’
LG생활건강의 프리미엄 브랜드 오휘가 줄기세포 배양액을 담은 프리미엄 크림 ‘오휘 더 퍼스트 제너츄어’를 출시한다. 새롭게 선보이는 오휘 더 퍼스트 제너츄어는 세계적 권위의 CHA 줄기세포 연구센터에서 공급받은 줄기세포 배양액을 담아 피부 개선에 효과를 발휘하고, 피부에 잠재된 노화 저항력을 되살려주는 프리미엄 토탈 케어 크림이다. 안정성이 약해 쉽게 파괴되는 줄기세포 배양 원액을 안정한 형태로 감싸고, 피부 흡수를 극대화시키는 제형 기술을 적용시켜 녹듯이 피부에 스며드는 흡수력을 선사한다. 문의 080-727-5252

8. 비오템의 워터 러버스 캠페인
아쿠아틱 전문 브랜드 비오템이 지구의 물과 물속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워터 러버스(Water Lovers)’ 캠페인을 펼친다. 첫 시작은 ‘지구에 남아 있는 오염되지 않은 마지막 바다, 남극 로스 해 살리기’ 프로젝트. 문명과는 격리된 살아 있는 해양 생태계이자 다양한 동물과 생물들의 터전인 남극 로스 해를 살리기 위해 비오템은 스톡홀름의 유명 일러스트 아티스트 잉겔라 P 이레니우스와 함께 디자인한 스페셜 홀리데이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하고, 제품 판매 수익의 일부를 국제 해양 구호단체인 미션 블루(Mission Blue)에 기부한다.
9. 하늘을 나는 시계, 해밀턴
100년의 항공 시계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해밀턴이 우리나라 공군 파일럿의 공식 시계가 된다. 해밀턴은 오랜 항공 시계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공군 부대와 공식적인 파트너십을 맺고, 파일럿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계로 자리 잡아왔다. 한국 공군이 선택한 시계는 견고하고 멋스러운 디자인에 파일럿 시계로서 필수적이고 다양한 기능을 갖춘 카키 에비에이션(Khaki Aviation) 컬렉션. 해밀턴은 각 시계의 백 케이스에 부대 전용 마크를 새겨주고, 초침 바늘 끝을 비행기 모양으로 특별 제작해주는 등 한국 공군 부대와 해밀턴의 기념비적인 첫 인연에 세밀한 정성으로 보답했다. 문의 02-3149-9523

10.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 루시에 네클리스
일본을 대표하는 컨템퍼러리 오트 쿠튀르 주얼리 루시에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로자 미스티카 네클리스를 소개한다. 고딕건축 양식의 웅장함을 매혹적인 로즈 골드와 플래티넘 골드의 조화로움으로 표현한 로자 미스티카 네클리스는 하이 퀄리티의 브릴리언트컷 다이아몬드를 아름답게 세팅하여 더욱 영롱한 광채를 느낄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형상화한 네클리스 뒷면의 디테일은 섬세한 장인 정신의 정수를 표현했다 . 문의 02-756-7568

11. 황금 비율의 다이얼, 그랑 랑에1
랑에 운트 죄네에서 대표 아이콘 랑에 1의 다이얼을 황금 비율로 확대한 그랑 랑에 1을 선보인다. 그랑 랑에1에는 황금 비율로 탄생한 새로운 케이스 사이즈에 맞춰 완전히 새로워진 매뉴얼 와인딩 무브먼트 칼리버 L095.1를 탑재했다. 시, 분, 초, 그리고 큰 날짜 창과 파워 리저브 표시 창은 어느 하나 겹치지 않고 솔리드 실버 다이얼에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직경 40.9mm로 출시되는 이 제품은 단 8.8mm의 얇은 두께로 조화로운 비율을 완성했으며, 단 1개의 메인 스프링 배럴로 공간을 적게 차지하면서 동시에 72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문의 02-756-7568

12. 보메 메르시에의 리니아 컬렉션
우아하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스위스 전통 워치 브랜드 보메 메르시에서 화려한 연말 파티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얼리 워치 모델 리니아 컬렉션을 제안한다. 리니아 컬렉션은 인덱스가 베젤에 인그레이빙된 독창적인 디자인과 쉽게 교체가 가능한 혁신적인 브레이슬릿 시스템이 특징이다. 선데크(sundeck) 패턴이 섬세하게 장식된 케이스 백에는 문구나 문양을 인그레이빙하여 한 사람만을 위한 독특한 오브제로 완성할 수 있다. 문의 02-3438-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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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메르시구스타브, 뉴 에펠 타워 시리즈 출시
프랑스 명품 인테리어 소품 브랜드 메르시구스타브가 겨울 시즌을 맞아 새로운 에펠 타워 시리즈를 선보인다. 프랑스 국기를 모티브로 스마일 심볼이 들어간 프렌치 스마일리, 판타지한 분위기를 살린 프린세스, 강렬한 핑크가 톤 온 톤으로 채색된 섹시 핑크 등 10여 가지의 시리즈를 통해 더욱 다양한 에펠 타워의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프랑스 팝아트 디자이너 발레리 아티넬리(Valeria Attineli)가 디자인한 프린세스는 몽환적이고 애니매틱한 느낌을 핑크, 그린 등의 화려한 컬러로 표현하여 프랑스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문의 02-3446-6230

14. 밀레의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 CM5
독일 명품 가전 밀레가 콤팩트 사이즈의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 CM5 2종을 출시했다. 스테인리스 재질에 고급스럽고 모던한 디자인으로 세련미를 높였으며, 높은 압력과 정확한 온도로 커피 원액을 추출해 풍부한 크레마와 최고의 향을 선사한다. 한 잔의 커피도 손쉽게 마실 수 있도록 별도의 전용 셔터를 장착했으며, 많은 양의 커피를 즐기거나 손님 접대 시에도 한 번의 버튼으로 최대 2잔의 에스프레소나 커피를 준비할 수 있어 편리하다. 전면부에 설치된 LCD 액정판은 커피 제조 방식을 저장할 수 있어 신속하게 원하는 커피를 즐길 수 있고 ‘세척 프로그램’을 도입해 기기 내부의 장치까지 자동 세척이 가능하다. 기존 빌트인 커피 머신과 동일한 부품을 사용함으로써 신뢰를 높였으며, 하루 7잔씩 20년 동안 사용하는 자체 테스트를 통과해 성능을 입증받았다. 문의 02-3451-9451

15. 독일 명품 소파 롤프 벤츠의 가을 프로모션
(주)영동가구의 유럽 최고 명품 브랜드 소파 롤프 벤츠(Rolf Benz)에서 2012년 밀라노 페어에서 공개한 새로운 모델을 10월 중순부터 선보인다. 특히 신제품 스칼라(SCALA)는 이태리 디자이너인 지노 카롤로(Gino Carollo)와 콜라보레이션한 소파로 매력적인 디자인을 자랑한다. 시트와 등받이, 쿠션을 각기 다른 색상의 패브릭으로 업홀스터리하면 더욱 독특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롤프 벤츠 신규 상품 입점을 맞아 12월 30일까지 롤프 벤츠 소파와 식탁 세트를 구매한 고객에게 120만원 상당의 트레이를 사은품으로 증정한다. 문의 02-547-7850

16. 헹켈과 스타우브, 온라인 백화점관 입점
이제 헹켈과 스타우브를 백화점 온라인몰과 주요 종합 쇼핑몰 백화점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쌍둥이 칼로 유명한 세계적인 주방 명품 헹켈과 프랑스 대표 주물냄비 브랜드 스타우브는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현대백화점, AK플라자백화점의 온라인 백화점관에 입점하여 백화점 매장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행사와 동일한 혜택을 제공한다. 또한 롯데아이몰, GS이샵, CJ몰 등의 주요 종합쇼핑몰의 백화점관에도 입점하여 보다 폭넓은 쇼핑의 기회를 제공한다. 문의 02-2192-9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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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인피니티의 특별 프로모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인피니티가 정부의 자동차 개별소비세 인하 방침에 따라 올해 12월까지 전 모델의 가격을 한시적으로 인하한다. 이번 개별소비세 인하 적용에 따라 인피니티 신규 고객들은 최대 150만원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또 올해 말까지 특별 프로모션으로 기존 인피니티 고객이 FX30d 구매 시 150만원, M30d 구매 시 130만원의 추가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문의 080-010-0123

18. 리츠칼튼 호텔의 오페라 웨딩
리츠칼튼 서울에서는 그랜드 볼룸과 포이어(foyer), 위층의 원형 난간 홀까지 포함해 총 2개의 층을 아우르며 진행되는 오페라 웨딩을 제안한다. 관객들은 1층부터 2층까지 둘러앉아 결혼식을 마치 오페라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최첨단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음악 소리는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며 오페라 웨딩의 드라마틱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오페라 웨딩을 진행할 경우 이그제큐티브 스위트 1박 숙박 혜택과 공항 샌딩 서비스, 예식 1주년 기념 선물, 평생 RC 웨딩 멤버십을 제공한다. 문의 02-3451-8233
19. 유럽풍 부티크 카페, 슬로우코치&트리
강남구 신사동에 정원이 아름다운 유럽풍 부티크 카페, 슬로우코치&트리가 오픈했다. 총 5개의 서로 다른 공간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양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이탈리아 정통방식의 화덕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항상 솔드 아웃되는 오가닉 베이킹 빵이 인기 아이템이다. 리셉션 파티, 오프닝쇼, 요리 강좌, 꽃꽂이 강연 등 다양한문화 공간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문의 02-514-4497

20. 포르쉐의 새로운 카레라 4 시리즈
신형 포르쉐 911 카레라 4는 엔진에 따라 911 카레라 4와 911 카레라 4S, 그리고 보디 형태에 따라 쿠페와 카브리올레 등 총 4가지 차종으로 출시된다. 엔진과 성능은 강화하면서 4개 모델 모두 이전 모델에 비해 차체 중량은 65킬로그램이 줄었고, 최고 16퍼센트까지 연비를 절감했다. 911 카레라 4 시리즈는 2008년 이후 총 2만 4천여 대가 판매되며 이전 세대 911(997 모델) 전체 판매량의 34퍼센트를 차지하는 성공신화를 이뤘다. 새로운 카레라 4 시리즈 역시 이러한 성공적 행보를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문의02 -792-2633
마이크
기타, 이선희 LP판
음악, 추억을 얘기하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나눠 낀 이어폰으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오던 순간, 극장 스피커를 통해 낮게 울려 퍼지던 김동률의 목소리는 수많은 동 세대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모이게 했다. ‘기억의 습작’은 이제 1990년대도 추억의 시대가 됐음을 말해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최근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여기에 기름을 더 끼얹었다. 음악 평론가들에게 ‘흑역사’와 같은 평가를 받았던 H.O.T.와 젝스키스로 대표되는 ‘아이돌 개막 시대’마저 추억이라는 이름이 더해지며 그 시대를 겪은 세대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단순히 음악에서 멈추지 않고 그 시절의 패션, 심지어 음료수 같은 소품들도 추억을 자극하는 디테일한 매개로 등장했다.
우리는 이미 그전에 ‘세시봉 열풍’을 통해 이런 추억의 힘을 경험한 바 있다. 송창식과 윤형주, 조영남, 이장희, 김세환 같은 가수들이 브라운관에 등장하자 TV 앞에서 주도권을 빼았겼던 장년층이 다시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세시봉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는 단순히 노래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를 살았던 장년층의 청춘을 다시금 소환하는 것이었다. ‘하얀 손수건’을 듣는 순간만큼은 그 시절의 대학생이 되었고, ‘그건 너’를 듣는 순간만큼은 1973년의 종로 거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음악은 그 주변부의 온갖 기억과 추억들을 함께 소환하곤 한다.

7 0 년 대 청년 문화를 대변하다
1970년대는 청년의 시대였다. ‘청년 문화’라는 말은 1970년대를 상징하는 열쇳말이었다.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와 함께 청년들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포크와 록 음악이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그 음악들을 앞장서 전파하던 곳이 음악 감상실이었다. 앞서 언급한 세시봉은 그 시절을 대표하던 음악 감상실이었고, 그 밖에도 디쉐네, 시보네, 아카데미, 뉴 월드 같은 음악 감상실들이 새로운 음악들을 소개하며 유행을 선도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음악 감상실의 인기 DJ들이 방송에까지 진출했다. MBC의 <밤의 디스크쇼>와 <별이 빛나는 밤에>, TBC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신중현과 김민기로 대표되는 록과 포크 음악은 이런 음악 감상실과 라디오 프로그램,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감상실에서 벗어나 직접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오비스 캐빈과 닐바나는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전설적인 클럽이었고, 각종 호텔들이 앞다퉈 라이브 클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록과 포크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른바 ‘가요 정화 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기세가 움츠러든 것다. ‘트로트의 왕정복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퇴행적이라 할 수 있는 트로트가 다시 전면에 부각되었고, 1970년대 초중반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음악인들은 자의보다는 타의로 음악을 그만두거나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의 가요계는 암흑기였다. 조용필과 송대관, 최헌의 노래들이 번갈아가며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했지만 1970년대 초반의 뜨겁던 에너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때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 다른 청년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MBC에서 개최한 ‘대학 가요제’가 발단이었다. 1977년 열린 제1회MBC <대학 가요제>가 기대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자 뒤를 이어 <해변 가요제>, <강변 가요제> 등의 행사들이 개최됐다. 대학생들은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그 안에 자신들의 이야기와 고민을 담아냈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던 가요계의 빈 자리를 가요제 출신 가수들이 하나둘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8 0 년대 라디오 스타, 팝의 첫걸음
1980년대에도 송골매, 이용을 비롯한 많은 가요제 스타들이 가요계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이 주로 섰던 무대는 <젊음의 행진>과 <영 일레븐> 같은 타이틀부터 젊은이들을 겨냥한 쇼 프로그램이었다. 1980년에 컬러 TV가 처음 선보인 이후, 방송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갔다.
주말 황금 시간대에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의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이 배치됐고, <가요 톱 텐>, <화요일에 만나요> 같은 가요·쇼 프로그램들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용필은 쇼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국민가수’라는 수식어까지 얻을 수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또한 전성기를 이어갔다. MBC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와 KBS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은 라이벌 프로그램으로 경쟁하며 팝 문화를 선도했고, KBS <전영혁의 25시의 데이트> 같은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음악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후 전영혁의 방송은 <전영혁의 음악 여행>, <전영혁의 음악 세계>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가장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음악 방송으로 자리하게 된다.
또한 1980년대는 공연 문화가 활성화된 시대이기도했다. 들국화로 대표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TV 쇼 프로그램에 기대지 않으며 공연이라는 독자적인 생존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전국을 돌며 소극장 무대도 마다하지 않았다. 뒤를 이어 등장한 헤비메탈 밴드들도 파고다극장과 숭의음악당 등을 중심으로 콘서트를 열었고, 다른 가수들도 소극장을 중심으로 장기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1970년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월간 팝송>을 시작으로 한 음악 전문지들의 창간, 그리고 직배사의 등장으로 외국의 팝 문화가 빠르게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이런 문화적 수혜를 받고 자란 이들이 곧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들로 성장하게 된다. 한국 대중음악의 최전성기라고 평가받는 1990년대가 이렇게 열린 것이다.

9 0 년대 빨리 막 내린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1980년대가 조용필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서태지의 시대였다. X세대와 오렌지족의 시대, 삐삐와 시티폰과 휴대전화가 나온 시대, 노래방과 비디오방, 소주방 등 각종 ‘방’ 문화가 등장한 시대, PC 통신과 인터넷이 대중화된 시대, 그리고 밀리언셀러 앨범이 쏟아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말은 곧 가요계가 엄청난 산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음악은 곧 산업의 일부가 됐고, 가요계는 체계화된 엔터테인먼트 산업 속으로 편입됐다. 기획된 아이돌 그룹들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대 팝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들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음악을 하면서도 수십 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하는 진기록을 속속 세웠다. 이 모든 화려한 기록이 한꺼번에 무너지기 전까지 1990년대의 가요계는 음악적으로든 판매고로든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 김건모, 듀스, 넥스트, 015B, 이승환, H.O.T. 등 전설적인, 지금까지도 우리 가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묵직한 무게감을 차지하는 이들이 1990년대를 상징했다.
하지만 90년대의 문화적인 윤택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장이 호황을 이루자 자본이 몰려들었다. 대기업들이 부나비처럼 단기간의 성과를 바라보며 덤벼 들었다가 급하게 철수했고, 그 뒤를 이어 SM엔터테인먼트로 대표되는 아이돌 기획사가 서서히 방송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아이돌과 방송의 공생 관계는 점점 다른 음악가들이 설 자리를 빼앗아갔다. 가요계에서 다양성이란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음반 판매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주류 가요계의 암흑기는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지나온 세대들은 여전히 그때를 추억하며 열광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를 보며 한때 치부라 여겼던 팬 클럽 문화를 흐뭇하게 회상하고, 자신들이 겪었던 문화적 경험들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이것들은 모두 추억이 만들어낸 힘이다. 제아무리 소태처럼 쓴 기억이라도 지나고 나면 아름답게 그려진다고 했다. 하물며 자신들이 직접 만들고 향유했던 것들이라면 그 추억의 힘은 더욱 강력할 것이다.
여기에 나이, 세대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1970년대를 보낸 이들에게 세시봉과 닐바나가 있다면 1980년대를 보낸 이들에게는 <가요 톱 텐>과 <토토즐>의 추억이 있다. 이제 어른이 된 1990년대를 보낸 이들에게는 서태지가 있고 H.O.T.가 있고 팬 클럽 문화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배경에는 음악이 자리한다. 음악은 추억과 더해질 때 더욱 힘이 세진다. 어린 시절에 자주 들었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유년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음악은 언제나 그 음악을 들었던 때와 장소로 듣는 이들을 안내한다. 때때로 추억은 음악을 이기기도 한다. 음악이 좋고 좋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추억에 따라 음악은 다르게 기억된다.
음악, 추억을 얘기하다.
봄여름가을겨울
봄여름가을겨울

오래된 것의 가치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거리의 악사’들

19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번째 노란색 앨범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연주곡을 앨범의 첫 곡으로 내놓는 무모함을 보여주었고, 얼마 뒤에는 국내 최초로 제대로 된 라이브 앨범을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올해도 그들은 의 10주년 기념 리마스터링 앨범을 발표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들을 선보이고 있다. 가장 모범적인 선배 밴드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쳐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얼마 전에 (2002)의 10주년 기념 앨범이 리마스터링되어 나왔어요. 앨범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거 같은데요
김종진 : 일단 이 음반이 너무 좋아요(웃음). 정말로 농담이 아니고, 지금 다시 만들라고 하면 만들 자신이 없는 음반이에요. 정말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때처럼 헝가리까지 가서 있는 돈 다 써가며 다시 할 자신이 없어요. 만 3년 동안 기획을 했고, 녹음만 5개월이 걸렸어요. 헝가리와 한국을 오가면서 거의 미친 짓을 한 거죠.
Q. 이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는 약간의 침체기가 있었잖아요.
전태관 : 공백이 한참 있었죠. 만날 DJ 활동만 하고 있었고. 안 좋았던 기간이었어요.
김종진 : 새로운 음악이 안 나오는 그런 시기였어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좀 쉬면서 충전을 한 게 우리에게는 약이 되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Q. 이번 리마스터링 앨범도 그렇지만 그 전에도 라이브 앨범 내고, 외국에 나가서 녹음하고, 연주 음반도 내고 했는데 이렇게 항상 앞서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였나요?
김종진 :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안 하니까 우리가 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도 안 해주니까 ‘우리라도 하자’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전태관 :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 하나 이루어나갔던 거예요. 세월이 이렇게 좀 지나서 보니까 젊었을 때 안 했으면 절대 못했을 것들이더라고요.
김종진 : 이번 리마스터링 작업도 그렇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걸 가능케하는 시도들은 없잖아요. 지금은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가 됐어요. 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했던 일들이 다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것들이에요. 라이브 앨범을 만들 때도 아무 정보도 없고 기재도, 경험도 없었어요. 말하자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데 올라본 사람도 없고 장비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아마도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만으로 모든 걸 직접 했어야 하는 시절이었죠.
Q. 항상 그렇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한국 음악사에서 가장 성공한 밴드들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가장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된 건데, 처음 1집을 발표할 때 이런 미래를 그려봤나요?
전태관 : 전혀 상상을 못했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그렸다면 1집의 타이틀곡을 연주곡으로 하지 않았을 거예요.
김종진 :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미학을 완성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Q. 김수철과 작은거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거친뒤에 봄여름가을겨울이란 이름으로 첫 음반을 낸 건데 이미 그 전부터 입소문이 났다고 들었어요.
김종진 : 제가 군대에 가 있을 때 태관이는 대학생이었어요. 빛과 소금의 (장)기호 형과 같은 부대에 있어서 외박을 같이 나왔는데 그때마다 신중현 선배가 운영하던 ‘라이브’ 클럽에서 우리 셋하고 (김)광민이 형이랑 함께 잼을 했어요. 아마추어는 우리밖에 없었고, 무당이나 따로 또 같이, 백두산 같은 프로 팀들이 무대에 올랐어요. 그렇게 소문이 좀 나서 수철이형과 현식이 형이 우리를 잡은 거죠.
Q. 지금도 대중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이 본격적으로 선보인 ‘퓨전 재즈’라는 음악은 1980년대에는 더 생소했을 것 같아요.
김종진 : 아예 없었어요. 몇몇 카페에서만 그런 음악들을 틀어줬어요. 말하자면 당시의 오렌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외국의 음악들을 듣고 얘기하고 했어요. 음악도 거의 백판으로 들었고, 명동에 있는 외국 잡지 파는 서점에 가서 <기타 플레이어>나 <다운비트>, <모던 드러머> 같은 잡지들을 읽었고요.
전태관 :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좋은 세상이잖아요. 유튜브 하나만 봐도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당시엔 음악을 구하기 힘드니까 더 소중하게 대했던 것 같아요. 이태원에 구하기 힘든 퓨전 재즈 음반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파는 조그만 레코드방이 있었는데, 음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어요.
Q. 두 분은 1970년대에는 음악 마니아로 지냈고,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990년대에 그 혜택을 본 건데 그렇게 거쳐오면서 각 시대가 어떻게 다른 것 같나요?
김종진 : 시간이 갈수록 대중들의 수준이 저열해지고 있는 건 분명해요. 낮아지고 열등해지고 있는 거죠. 음악을 던져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거예요. 바뀐 게 아니라 저열해진 거예요. 대중이 저에게 돌을 던져도 어쩔 수 없어요. 지구가 돌고 있는데 안 돌고 있다고 거짓말할 순 없잖아요. 음악에 있어서 만큼은 시간이 갈수록 저열해지고 있어요. 이해력과 감상력이 현저히 떨어졌어요. 그게 너무너무 안타까워요.
Q. 봄여름가을겨울이 어떤 밴드로 기억되기를 바라나요?
김종진 : 우리가 디딤돌 같은 밴드가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밴드들이 나와도 좋고, 봄여름가을겨울 같은 밴드도 있었으니까 우리도 버티고 해보면 될 수 있지 않겠어 하고 힘을 줄 수 있는 밴드가 됐으면 좋겠어요.
015B
015B

솔직과 순수가 공존하는 90년대를 열다

‘복고’는 적당한 텀을 두고 어김없이 회자되곤 하는 단어이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그리 멀지 않은 듯한 1990년대가 벌써 복고라는 이름으로 재조명되기에 이르렀다. 90년대가 주목받으며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015B에게로 향했다. 1990년에 데뷔해, 정확하게 90년대를 관통한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자란 90년대의 청춘들에게는 ‘015B 세대’라는 특별 수식어까지 함께한다.

Q. 015B는 독특한 소재와 가사가 인상적인데요, 90년대 초반에는 환경에 대한 인식을 거의 못 하던 때잖아요. 누구도 하지 않은 얘기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장호일 : 사실 몰라서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요? 특별히 독특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어요. 저희는 지방에서 올라온, 이를테면 유학생들이라 오래 밴드 생활을 했던 다른 가수들처럼 선배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거나,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기준에 얽매일 기회가 없었어요. 가사도 정석원 씨가 주로 썼는데, ‘정말 특이한 곡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놀래켜 줘야지’라는 식의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생각한 대로 했을 뿐인데, 그런 평을 하시더라고요.
Q. 발표하는 음반마다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것도 015B만의 특징인 것 같아요.
장호일 : 음악 색깔이 변화하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악기인 것 같아요. 이미 테크놀로지가 많이 발전하고 안정화되어서 특별히 새로울 게 없는 시대가 21세기라면, 90년대 초중반에는 새로운 악기들이 계속 등장했거든요. ‘미디’라는 악기가 등장하면서 음악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악기에 따라서 편곡도 달라지니까. 그리고 3집을 준비할 때 ‘샘플러’라는 악기가 등장해서 만든 곡이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에요. 새 악기가 등장하면서 음악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죠.
Q.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편이죠?
장호일 : 어떻게 보면 선구자라고 할 수도 있어요. 새 악기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신기하고 새롭거든요. 악기에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 많은데, 3집에 수록된 곡 대부분이 샘플러의 영향을 받았어요.
Q. 7집도 상당히 독특했어요. 6집까지 발표했던 015B 음악이랑은 또 달랐는데, 어떤 콘셉트였어요?
장호일 : 그때는 알앤비였던 것 같아요. 알앤비나 알앤비 힙합 스타일. 그래서 기존의 015B 팬들이 ‘갑자기 알앤비 힙합이 웬 말이냐’며 당황했던 경향이 있었는데, 몇 년 지나니까 의외로 7집을 명반으로 꼽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때 생각을 못 했던 점이, 우리 음악을 감수성 있게 받아들이는 팬들도 나이가 든다는 거예요.(웃음) 사실은 예전부터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015B 스타일이었거든요. 늘 남들은 하지 않는 시도를 했고, 7집에도 똑같이 적용했는데 오래된 팬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015B 색깔이랑 다르다는데 대체 015B 색깔이 뭐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건 뭘까’ 우리도 의아했어요.
Q. 그럼 다음 음반이 갈 방향은 팬을 따라서?
장호일 : 사실 7집 때 그런 반응이 있어서 잠시 흔들리기도 했는데, ‘팬들의 기대에 맞춰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론은 ‘아니다’로 냈어요. 원래 우리 스타일대로 하던 음악을 팬들이 좋아해줬으니,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지키며 가자는 쪽으로요.
Q. 7집이 2000년대 중반에 출시되었으니, 6집까지 발표했을 때와는 음반 시장도, 팬들도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가장 큰 차이는 뭐였어요?
장호일 : 일단은 팬들의 호흡이 굉장히 빨라졌다는 점이에요. 요즘은 신곡을 발표하고 2주에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굉장히 옛날 노래가 되어버려요. 최근에 우리가 싱글 위주로 활동하는 패턴으로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예요. 예전에는 1년에 한 번씩만 발표해도 완급 조절이 가능했는데, 요즘엔 조금만 머뭇거리다가 홍보하려고 하면 이미 뒤처진 느낌이거든요.
Q. 문화적으로 윤택했던 90년대에 비해 2000년대는 아이돌을 제외하면 콘텐츠가 없다는 얘기들도 나오던데요, 어떻게 보세요?
장호일 :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늘 하는 대답이 있어요. ‘문화는 항상 거기 있다. 당신들이 가지 않는 것일 뿐’. 약간 비판적으로 얘길하자면, 자기들이 감수성 예민했던 시절, 그때는 좋았다고 회상하는 어른들이 있는데, 사실 훌륭한 밴드는 항상 많이 있어요. 홍대에만 가도 정말 음악 잘 하는 후배들 많아요. 아이돌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특별히 10대들을 위한 차별은 아니라고 봐요. 10대들이 그만큼 시장을 형성하니까, 제작자들이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거죠. 문화 산업이지만 동시에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하잖아요.
사실 한창 감수성 예민하고, 그만큼 음악도 많이 듣는 세대는 10, 20대예요. 그러다 디지털 시대로 바뀌면서 지금의 30대 팬들은 어느 순간 시장에서 멀어져가는 층이 된 거죠. 요즘 다시 편입이 되고 있긴 한 것 같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는 그들 스스로도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았을 테고, 예전처럼 CD를 구입하려니 그것도 쉽지 않고, 디지털로 들으면 듣는 것 같지 않았을 테고… 소비자들도 방황하고 있다가 지금은 아예 디지털 음원을 듣는 시스템으로 변했으니 요즘엔 30대들도 다시 자연스럽게 편입되고 있는 것 같아요.
Q. 대중음악이 풍부했다던 90년대 키워드는 뭐였을까요?
장호일 : 싱어송라이터? 당시에는 싱어송라이터가 기본이었어요. 신승훈, 김현철, 윤상, 전람회 같은 분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그냥 가수로 활동하는 분들도 물론 많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가요계에 큰 획을 남기는 분들은 싱어송라이터 출신들이에요. 저희도 직접 가사 쓰고 작곡 했으니, 그런 가수들 새 음반이 나오면 항상 듣고 품평도하곤 했어요. 경쟁심도 느끼고 자극도 받고요. 저희는 방송 활동은 거의 안 했고 음반 위주로만 활동했으니까. 가요든 팝이든 항상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Q. 015B와 성격이 비슷했거나 라이벌이었던 가수는 누구였어요?
장호일 :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음악이 비슷한 팀이 없었으니까. 사실 저희에게 음악 장르를 물어오면 대답하기가 참 애매해요. 발라드도, 댄스도 아니고, 퓨전 재즈는 더 아니었으니, 특별히 규정할 수 있는 장르도 없어요. 재밌는 건 가끔 저희를 발라드 가수로 기억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이 분은 누구를 기억하는가’ 궁금해지죠. 015B 노래 중에 발라드는 거의 없거든요. 발라드곡이 타이틀이었던 적도 없고. 음반에 열 곡이 수록되었으면, 그중 발라드는 한 두곡 정도?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라드 팀으로 기억하시더라고요. 하긴 강렬한 하드록 음반에 록발라드가 한두 곡 들어가면 집중도가 높아지긴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가?(웃음)
Q. 90년대를 표현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뭘까요?
장호일 : 당시에는 ‘솔직함’이 많이 노출됐던 것 같아요. 노래 가사에도 부쩍 ‘인스턴트 러브’ 같은 종류가 많았고, 소위 ‘오렌지족’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70, 80년대에는 김민기 씨의 ‘아침이슬’처럼 정치나 사회적인 색깔이 음악에 많이 묻어났지만 90년대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우리는 오로지 사랑 놀음?(웃음) 패션도 독특했던 것 같아요. 헤어 젤이나 무스가 처음 등장했고, 밝은색으로 염색하고 귀걸이를 하는 남자들도 많았어요. 찢어진 청바지나 핫팬츠 같은 것도 이미 등장했었고. 요즘에 다시 컬러 염색이 유행하는 걸 봐도 새롭진 않잖아요.
90년대는 70, 80년대의 무거운 고뇌가 끝난 시대라, 사회적 고민보다는 자기에게로 관심이 쏠리면서 개인적인 경향이 나타나는 세대의 시작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첨단 기기들도 이미 처음 경험한 세대잖아요. 지금은 단지 거기서 업그레이드됐을 뿐이지 전혀 새로운건 아니니까.
Q. 그때 015B 팬들이 ‘우리는 특별해’하는 식의 자부심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는 거 혹시 아세요?
장호일 : 예전부터 오래 알고 지내던 팬들과 얘기하다 보면 가끔 그런 얘기가 나와요. 얼리어답터라든지, 대세를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사실 015B도 그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잘 안 듣는, 자신만의 취향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가져서일까요? ‘나는 015B 듣지’ 그런 느낌?
Q. 앞으로의 계획은요, 곧 8집을 들을 수 있을까요?
장호일 : 8집보다는 곧 새 싱글이 나올 예정이에요. 정규앨범은 사실 타이틀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싱글은 다르거든요. 한 곡 한 곡이 타이틀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닐 수도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거든요. 분위기는 아직 생각 중이에요. 계획을 짜고 작업하다가도 막상 일주일 앞두고 바뀌기도 하니까. 지난 앨범에 수록된 곡을 리메이크할지, <월간 윤종신>에 발표했었던 ‘망고 셰이크’ 처럼 하드록이 될지는 잠시 기다려주세요.
SP & 축음기, LP & 턴테이블
테이프 릴 & 테이프 릴 레코더, 콤팩트 카세트와 포터블 카세트 데크, 콤팩트 카세트와 퍼스널 카세트 데크
오디오, 진화하다

음악을 듣는 방법의 10가지 변화

소리를 기록 매체에 담아 언제, 어디서든,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에디슨의 공이 컸다. 최근에는 에디슨보다 몇 년 앞선 기록이 새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테크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늘 시작보다 결과. 가구처럼 집의 한 부분을 차지하던 덩치 큰 축음기에서 시작해 휴대전화 기기 속으로 들어오기까지 오디오 진화의 역사도 화려했다. 작고 편리해져서 더 고마운 오디오 이큅먼트의 변천사

SP & 축음기
축음기는 평평한 디스크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소리 저장 매체다. 흔히 ‘턴테이블’이라고 부르는 LP 플레이어와 같은 계열에 속하긴 하지만, 보통 축음기는 45Rpm 혹은 78Rpm 의 회전속도를 이용하는 SP(Sing Playing Record)를 재생하는 기기를 지칭하고, 테이프 동력을 이용한 경우가 많다. 테이프 동력을 이용한다는 말은 야외에서도 전기 없이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얘기. 최초의 녹음은 1925년 아트 길럼의 ‘The Whispering Pianist’였다.
축음기는 대중화된 측면에서 인류 최초의 음악 감상 도구라고 보면 된다. 흑백 무성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스윙 리듬의 흥겨운 재즈를 들려주는 나팔관 모양의 기기가 바로 그것. 현재까지도 오디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컬렉팅 아이템이고, 1930년대에 발매된 오리지널 SP 역시 현재 장당 10~20만원 이상의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LP & 턴테이블
내구성이 취약했던 SP의 단점을 보완해 세계 최초로 발매된 LP(Long Playing Record)는 ‘콜럼비아 마스터워크스 레코드(Columbia Masterworks Records)’에서 제작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작품 64>. 1948년 발매된 이 앨범은 당시까지 일반적인 레코드로 통용되던 SP와 비교하여 훨씬 많은 용량을 기록할 수 있었다. LP에 흔히 써 있는 ‘33 1/3’이라는 rpm 또한 이때부터 통용되었다.
아마도 현존하는 기록 매체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았고, 또 2012년 현재에도 가치가 퇴색되기는커녕 오히려 마니아들 사이에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꾸준히 호평받는 유일한 매체일 것이다. 태생적으로 가지는 커다란 부피로 인해 자연스레 같이 커질 수밖에 없는 앨범의 아트워크와 부클릿은 시각적으로도 음악 팬들에게 큰 가치를 부여하고, 특유의 ‘지글거리는’ 노이즈는 단점이라고 보기엔 중독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힙합과 일렉트로닉이라는 장르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디제잉에 가장 적합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인 수요가 있을 것이다. 턴테이블이 없어도, 그래서 음악을 듣지 못해도, 매체 자체로 폼 나는 물건은 LP가 제일. 1994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인기 가수가 새 앨범을 발표할 때면 LP, 카세트테이프, CD 3종류로 발매하곤 했다.

테이프 릴 & 테이프 릴 레코더
테이프 릴 레코더는 1930년대 후반에 독일에서 만들어 전쟁에 활용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군이 기술 자료를 입수해 1948년부터 방송에 사용했다. 이후 LP와 테이프 레코더가 비슷한 시기에 상용화가 되었던 만큼 어쩌면 둘은 공생과 동시에 대립 구도에 있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디지털 방식을 차용한 DAT가 쓰이기 전까지 방송용으로도 각광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대학 시절 교내 방송국에서 PD로 활동하던 나도 커다란 테이프 릴을 한쪽 회전판에 고정시키고, 테이프의 끝을 다른 쪽 회전판에 감아 녹음했었다. 당시에는 아나운서의 멘트나 음악 사이사이 공백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녹음 버튼을 눌러놓은 채 양손으로 릴 테이프를 붙잡고 좌우로 미세하게 돌려 지우는 식으로 음성을 편집하곤 했다.

콤팩트 카세트와 포터블 카세트 데크
콤팩트 카세트는 자기 테이프를 용기에 넣어서 이 용기 그대로 기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미국 RCA사에서 1958년에 최초 발표했으나 당시엔 한쪽 면으로만 플레이가 가능했고, 지금처럼 양방향 플레이가 가능한 형태는 네덜란드의 필립스사에 의해 1963년 제품화되었다. 컴퓨터의 입력 신호를 기억할 수 있는 자기 필름을 한 줄로 감아 휴대와 운반이 편리하게 만든 것이 특징.
MP3 이전까지 ‘가장 휴대가 용이한’ 기록 매체 중 하나였기 때문에 LP와 더불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80년대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보면 성인의 몸통만 한 포터블 카세트 데크를 어깨에 지고 나와 춤을 추는 장면이 한 번쯤은 나오고, 실제로도 당시에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날에는 꼭 반에서 한두 명씩은 집에서 카세트 데크를 들고 와 음악을 틀곤 했다. 포터블 카세트 데크는 플레이를 위한 데크가 1개인 싱글 데크와 2개인 더블데크로 나뉘어 분류되었는데, 보통은 ‘공테이프’를 이용해 자유롭게 음악을 더빙하고 편집이 가능했던 더블 데크가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LP가 읽기(Play)만 가능했던 매체임에 반해 콤팩트 카세트는 쓰기(Record)도 가능했다는 점이 최고 강점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들로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들어 취향대로 들을 수 있고, 또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들을 녹음해 친구에게 선물로 줄 수도 있다는 점은 음악을 듣는다는 취미가 대중에게 파고드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좋아했던 이성에게 편지와 함께 러브 송이 듬뿍 담긴 60분짜리 테이프를 건넸던 일은 지금 30~40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경험. 라디오를 듣다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튼다는 DJ의 멘트가 나오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세트 데크의 녹음 버튼을 눌렀던 것도 80~90년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경험. 그러고 보니 그때는 음악을 들으려면 ‘노력’이 수반되어야 했다.

콤팩트 카세트와 퍼스널 카세트 데크
콤팩트 카세트의 휴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개발된 퍼스널 카세트 데크는 1979년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독일 출신의 안드레아스 파벨이 고안한 퍼스널 카세트 데크는 소니사의 ‘워크맨’이라는 제품명이 고유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퍼스널 카세트 데크는 처음 고안되었을 당시에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음악은 (듣고 싶든 듣기 싫든) 누군가 틀어놓으면 다 같이 공유하는 개념이었기에, 헤드폰을 통해 혼자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기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제품이 발매되자 대중은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개인의 선택에 따라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과 포터블 기기에 비해 엄청난 휴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퍼스널 카세트 데크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크기와 무게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후에는 테이프를 교체하지 않아도 반대 면을 재생하는 오토리버스, 각 곡의 인터미션을 찾아서 그 부분부터 플레이가 가능한 곡 찾기 기능 등이 추가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퍼스널 카세트 데크는 당시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입학과 졸업 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위를 고수했을 정도로 ‘선물계의 끝판왕’이었다.

CD & 포터블 CD 플레이어
휴대성에 특화된 콤팩트 카세트와 달리, 무려 30년 넘게 유지된 LP의 전성기는 소니사와 필립스사가 공동으로 상용화한 CD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쇠퇴의 길을 걷는다. 소니에 의해 1982년 최초로 양산된 CDP-101은 소리를 2진수로 부호화하여 저장하는 디지털 레코딩 방식을 차용했으며, CD의 러닝타임인 ‘74분’은 당대 최고의 지휘자이자 소니의 공동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의 친구였던 카라얀이 베토벤 교향곡 <합창>의 연주를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용량으로 감수하고 제안한 것이었다(추후에는 CD의 용량이 80분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레코딩, 믹싱/편집, 마스터링이 모두 디지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DDD’ 표기가 일반화되었다.

CD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면서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형태를 가진 기록 매체’, 특히 음악을 전문적으로 담는 일반화된 매체 가운데 현재까지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MP3의 간편함에 밀려 10년 전과 비하면 비중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최상의 음질로’ 음악을 듣기 위해서 CD를 찾는 버릇은 여전하다. 대부분의 음악들이 CD(오프라인)와 MP3(온라인) 2가지 종류로 발매되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의심할 필요 없는 ‘현역’이다. CD는 상용화되고 난 이후 가정용 오디오와 포터블 카세트 데크 시장에 빠르게 흡수되면서 음악 기록 매체의 1순위로 빠르게 등극했다. 더블 데크와 라디오 기능이 전부이던 포터블 카세트 데크는 CD 플레이 기능을 추가하면서 성능을 보완했으며, CD의 음질을 고품질의 크롬 테이프에 담아서 최대한 음질 손실 없이 퍼스널 카세트 데크로 듣는 방법도 각광받았다. 90년대만 해도 자동차 오디오에는 카세트 데크가 기본, CD 플레이어는 옵션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차에 CD 플레이어가 구비되어 있으면 비싼 차’라는 공식도 있었다.

CD & 퍼스널 CD 플레이어
퍼스널 카세트 데크로부터 시작된 개인화와 휴대화에 대한 욕망과 구현은 CD 시대에도 유지되었다. 1981년 공개되고 1982년 양산된 CD 플레이어는 불과 2년 만에 휴대용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1984년 말 소니사에 의해 공개된 D-50은 최초의 퍼스널 CD 플레이어로, 고가이던 CD 플레이어의 기기 가격을 낮추는 데 일조하면서 CD의 대중화에 불을 지폈다.
CD는 콤팩트 카세트보다는 휴대성이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LP처럼 휴대 자체가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고, 특히 아날로그 방식의 음질을 훨씬 뛰어넘는 디지털로 녹음되었기에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전성기를 누리던 90년대에는 여러 장의 CD를 알맹이만 쏙 빼서 휴대할 수 있는 파우치 케이스를 누구나 가방에 넣고 다녔고, 길거리나 지하철에서도 CD 플레이어를 꺼내 CD를 갈아 끼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CD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작고 얇은 CD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개발됐으며, 음악 시장의 기본 매체로 계속 인정받으며 그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디지털 방식의 도입으로 인해 CD 플레이어는 각각의 트랙을 정확히 나눠서 바로바로 스킵할 수 있는 곡 선택 기능이 기본적으로 제공되었고, 리모컨 조정 또한 가능해 편리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앨범 전체를 하나의 큰 주제로 보고 각각의 주제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곡을 구성하는 콘셉트 앨범의 경우에도 LP나 콤팩트 카세트의 경우엔 A면과 B면을 나눠야 하는 핸디캡이 있었지만 CD는 끊김 없이 한 면에 그 모두를 담을 수 있어서 콘셉트 앨범의 유행에도 일조했다(우리나라에서는 ‘넥스트’가 콘셉트 앨범을 자주 발매했다).

MD & MD 플레이어
세계 최초로 퍼스널 CD 플레이어를 만들었던 소니는 1992년 1월, 또 하나의 신제품을 공개했다. 콤팩트 카세트와 CD의 단점을 보완한 MZ-1이라는 제품을 선보인 것. 이 제품은 MD(Mini Disc)라는 기록 매체를 사용 하는데, CD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방식을 차용해 뛰어난 음질을 확보하면서도 쓰기 기능을 기본으로 제공해 레코딩이 불편했던 CD 플레이어의 단점을 보완했다. 즉, CD와 유사한 디지털 음질로, 내 마음대로 음악을 편집·녹음할 수 있는 궁극의 기기를 공개한 것. 게다가 ‘LP 모드’를 활용하면 한 장의 MD에 여러 장의 CD를 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MD는 소니의 고집과 높은 가격으로 제품의 표준화와 대중화에 실패하면서 짧은역사를 끝맺었다.
한때 MD는 트렌드세터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전히 대중이 휴대용으로 카세트를 애용하던 90년대 중반에 음악이나 기기에 관심이 많은 마니아들은 이미 퍼스널 CD 플레이어를 사용한 지 오래였고, CD 플레이어에 불편함을 느끼던 이들은 MD가 공개되자마자 유행처럼 하나씩 구입하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음악계에 몸담고 있다 보니 주변에 음악 마니아들이 많은데, 당시 내 주변에도 서너 명 중에 한 명은 MD 플레이어를 소유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디지털 레코딩’은 MD가 가진 최대의 매력이었으며, 별도의 보호틀 없이 알판이 그대로 노출되어 흠집에 취약했던 광디스크의 약점을 보완해 콤팩트 카세트처럼 디스크를 플라스틱 케이스로 둘러싸 충격이나 스크래치에서도 보호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MD가 막 꽃을 피우려는 90년대 중후반에 MP3 플레이어가 개발되면서 대중의 관심이 급속도로 한쪽으로 쏠리게 되었고, MD나 CD 같은광디스크 매체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다만, CD는 음악 기록 매체의 1순위로 이미 등극했기에 광디스크의 홀대 속에서도 꾸준한 수요가 있었지만, MD는 대중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불꽃이 꺼진 케이스라 지금은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MP3 & MP3 플레이어
음원을 기록하는 매체가 파일 형태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MP3(파일) 때문이다. 최초의 MP3 플레이어는 한국(!)에서 개발했다. 1997년 디지털 캐스트가 개발하고 새한에서 발매한 용량 32메가의 엠피맨(MPman )은, 당시 특허를 획득하려 했으나 벤처 기업의 한계상 다른 기업들의 견제와 소송으로 특허료를 내지 못해 자격이 소멸되었다. 그때 만약 세계적인 특허를 획득했더라면 지금쯤 애플은 아이팟을 파는 만큼 국내에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MP3와 그 이전 기록 매체들의 확연한 차이는 형태가 없다는 점. LP에서 CD로,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넘어오는 과정에는 모두 눈으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가 있었다. 하지만 MP3는 ‘음악은 있으나 형체는 없는’ 무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기록 매체보다 반감이 많았다(사실 지금도 MP3를 부정하고 CD만 인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음악 자체의 ‘소리’뿐 아니라 그 음악을 담은 매체의 ‘이미지(앨범 재킷 등)’도 함께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직 소리만 담긴 MP3는 뭔지 모를 결핍감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치명적 단점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무색, 무취, 무형의 이 요상한 매체는 1개를 갖고 있어도, 1천 개를 갖고 있어도, 부피에 변화가 없다. 아무리 크기가 작은 기록 매체라도 그 수가 천, 만 단위로 올라가게 되면 부피가 늘어나 보관이 부담스러워지는데, 이건 그 이상의 높은 단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무한정으로 보관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하드디스크처럼 MP3를 담을 수 있는 또 다른 기록 매체-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CD가 될 수도 있다만 확보된다면, 무한으로 담을 수 있다는 간편함이 MP3가 가진 최대의 강점일 것이다.

MP3 & 스마트폰
휴대전화 기기가 발전하면서 단순한 전화 기능을 넘어 카메라, 컴퓨터 등의 역할까지 도맡으면서 자연스레 MP3 플레이어 기능도 하게 되었다. 대중은 여러 개의 기기를 들고 다니는 번거로움보다 성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휴대전화 하나로 다양한 기능을 해결하는 간편함을 반기고 있으며, 이때문에 MP3 플레이어 역시 불과 2~3년 사이에 스마트폰으로 상당 부분흡수되었다.
아이리버가 전도유망한 회사로 각광받고, 아이팟이 MP3 플레이어의 간판이 된 것이 불과 10년 전이다. 10년 전만 해도 MP3 플레이어는 무한하게 확장될 가능성이 있었고, 턴테이블이나 CD 플레이어가 그랬던 것처럼 MP3 플레이어를 생산하는 사업 또한 향후 30~40년 동안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릴 거라 생각했다. 물론 기록 매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파일, 즉 MP3다. 하지만 이런 MP3를 이용할 수 있는 기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음악을 재생하고, 뮤직비디오를 보는 정도에 불과했던 MP3 플레이어보다는 전화, 게임, 카메라 등 다양한 기능들까지 모두 포함된 ‘All In 1’을 찾게 된 것.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스마트폰은 ‘항상 음악을 들어야만 하는’ 열성 음악 팬이 아닌, 가끔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국내에서는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아이폰 3GS가 발매된 것이 2009년 11월이니 불과 3년 만에 대부분의 MP3 플레이어가 스마트폰으로 대체된 셈이다.
CD 플레이어, MP3 & MP3 플레이어, MP3 & 스마트폰
70년대 패션
그 시절 우린 뭘 입었지?

어김없이 순환하는 복고 패션의 재림

한때는 장발에 통기타, 그리고 청바지가 젊은이들만의 특권처럼 거리를 메웠고, 또 어느 한때는 부풀린 어깨와 풍성한 보디라인의 패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패션계에서 매 시즌 유행에 사용되는 키워드는 복고. 2012년 가을과 겨울에는 90년대 스타일이 유행이다. 90년대 패션이 ‘복고’라는 이름으로 유행이 된 것은 패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엊그제만 같았던 90년대가 어느덧 복고가 되었다니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70년대부터 리와인드 해보는 올드 패션.

Back to 70's Style 통 넓은 팬츠 전성시대
1970년대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 틈을 타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저항해 나체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장발과 ①벨 보텀 팬츠, 일명 나팔팬츠로 대변되는 70년대 패션은 미국발 히피 문화를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표방하면서 대중화되었다. 기존의 질서와 이념을 거부하는 히피 문화는 군부독재의 억압과 획일주의를 거부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꽉 끼는 청바지와 ②뱅 헤어의 긴 머리, 생맥주 한 잔으로 젊은이들은 자유를 표현했는데, 그 시대에 활동하며 70년대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세시봉 멤버로 불리던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양희은 등의 옛 앨범 재킷을 보면 어김없이 통이 넓은 청바지를 교복처럼 입고 장발에 통기타를 메고 있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남자들의 장발과 60년대부터 유행한 여자들의 미니스커트는 무릎 위로 17cm 이상 올라가면 제재 대상이 되어 무수한 젊은이들의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다.
세계적으로는 파리 ③오트 쿠튀르 중심이던 패션계에 미국이 패션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진 팬츠는 젊음의 상징이 되었고, 반체제 메시지를 담아내는 도구로 티셔츠를 사용하며 유니섹스 룩을 정착시켰다. 유럽에서 선보인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낸 짧은 숏 팬츠는 파격적인 노출에도 범세계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여성 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여성들은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는가 하면, 매니시한 팬츠 슈트 역시 유행했다. 성의 구분이 모호한 중성적인 팬츠 슈트에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던 ④이브 생 로랑의 사진이 시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70년대는 다양한 팬츠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1970년대 미국의 극장가와 사회는 물론,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주도했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토니’로 출연했던 존 트라볼타는 통이 넓은 바지와 깃 폭이 넓고 화려한 색상의 재킷을, 여주인공 ‘스테파니’로 출연했던 카렌 린 고니는 색상대비가 선명한 의상을 선보였다. 토니와 스테파니는 친구들과 함께 디스코 경연 대회에 나가기 위해 디스코텍에서 춤추는 장면이 속속 등장하는데, 영화의 흥행 지수에 비례해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 했던 그룹 비지스(Bee Gees)의 음악과 ‘디스코’라는 춤은 70년대만의 새 트렌드로 등극했다.
또한 60년대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시대에서 맥시멀리즘(Maximalism)으로 전환되면서 길이는 길어지고, 솔리드보다는 멀티컬러의 스트라이프, 프린트, 자수, 프린지, 러플 등의 장식이 많아지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안재욱이 선보였던 의상들은 70년대 패션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밝은 톤의 슈트에 콘트라스트가 강하면서 끝이 뾰족한 셔츠 깃에, 바지는 밑으로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일명 나팔바지가 그의 대표적인 룩이었다.

친절한 70’s 패션 용어 풀이
①벨 보텀 팬츠 Bell Bottoms Pants 1960년대 말 등장하여 70년대까지 크게 유행했던 종 모양의 바지. 바짓단 쪽으로 향할수록 통이 넓어지는데, 나중에는 일상복에서도 둘레가 60cm 이상이나 되는 옷이 등장하기도 했다.
②뱅 Bang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
③오트 쿠튀르 Haute Couture 소수의 고객만을 대상으로, 고객의 모든 니즈에 맞춰 제작된 맞춤복
④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라고 칭송받았던 프랑스의 패션디자이너. 21세에 일찌감치 파리 최대 오트 쿠튀르 하우스인 ‘크리스티앙 디오르(크리스찬 디올, Christian Dior)’의 수석 디자이너로 혜성같이 패션계에 등장한 이후, 2002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20세기 후반 패션을 이끌었다. 스트리트 패션을 사랑해 기성복 라인(Ready to Wear)을 론칭하고 여성에게 바지를 입히는 등 사회의 흐름을 미리 읽고그에 맞는 새로운 패션을 제시한 혁명가로 불린다.
80년대와 90년대 패션
Back to 80's Style 경제도, 패션도 버블버블
1980년대는 세계적으로 경기 호황이 이어지며 거품이 일던, 일명 버블(Bubble) 시대였다. 두발과 스커트 길이마저 단속 대상이 되는 등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가 강했던 70년대와 달리 80년대에는 넉넉해진 경제 사정과 더불어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돈을 잘 벌고, 옷도 잘 입으며, 부자들은 마음껏 사치를 즐겼으나 그만큼 빈부의 격차도 커졌음은 물론이다.
사회적인 버블이 패션계로 전이되며 나타난 역삼각 형태의 ①빅 룩(Big Look)은 80년대를 대표하는 룩이다. 어깨가 커 보이는 ②레그 오브 머튼 슬리브의 재킷이 대표적이고, 여성의 경우에는 허리가 강조되고, 힙이 부풀려진 펌프킨 스커트가 대표적이다. 80년대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쇼·오락 프로그램이던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떠올려도 당시의 패션 트렌드가 보인다. 메인 MC로 활약했던 이덕화 씨는 화이트 컬러에 상의가 풍성한, 디자이너 ③앙드레 김 스타일의 의상을 주로 입었고, 당시 개봉했던 영화속 여주인공들 역시 다들 어깨가 넓어 보였다.
패드를 넣어 어깨를 강조한 재킷, 그리고 60년대 스타일만큼이나 짧지는 않지만 미니스커트가 다시 유행하게 되었고, 바지도 힙을 강조하는 턱(Tuck) 디테일의 일명 ‘승마 팬츠’ 스타일이 유행했다.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1987년에 ‘그녀에게 전해주오’라는 슬프지만 경쾌한 리듬의 댄스곡으로 데뷔해 오디오와 비디오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었던 최초 댄스가수 그룹 ‘소방차’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즐겨 입었던 승마 바지는 한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큰 붐을 일으켰다. 도트(Dot) 무늬, 진주 소재의 액세서리 역시 유행했다.
70년대에 히피가 있었다면, 80년대에는 ④여피족이 중요한 심벌이었다. 그들은 항상 말쑥한 비즈니스 슈트에 넥타이를 맸고 이러한 현상은 70년대의 캐주얼 붐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기도 했다. 영국의 찰스 왕자와 다이애나 비의 웨딩 사진은 80년대 당시 트렌디 스타일을 보여준다.
80년대 우리나라만의 특징으로는 스포티한 의상의 유행이다. 1988년에 있던 24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사람들의 옷은 한층 더 세련되고, 스포티해졌다. 형광색,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 연보라 등 밝고 원색적인 색감이 유행하며, 스포티 캐주얼(Sporty Casual)의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포츠웨어가 일상복으로 전환되었다. 또 하나의 큰 특징은 레이어드룩. 포멀과 캐주얼, 남성성과 여성성을 무시하고 여러 가지를 섞어 입거나 겹쳐 입는 패션이 등장하며, 옷은 한 톤으로, 또는 차례대로 하나씩 입는다는 나름의 고정관념을 깼다.
젊은이들은 미국의 팝송에 열광했다. 이 시기는 ‘팝의 황제’라 불리는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로 그는 전 세계인의 우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이 조지는 ‘여자다운’, ‘남자다운’이라는 고정관념을 깼고, 마돈나와 프린스는 성에 대한 노골적이고 과감한 의상 표현으로 사회적 금기를 깼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팝송 가사로 영어 공부 하는 게 유행이었고 이들의 사진으로 만든 책받침이 크게 유행했다. 70년대의 복장 규제에서 벗어나 교복과 두발의 자율화가 확산되었고, 교복 대신 다양한 스포츠 브랜드가 유행한 시기이기도 했다.

친절한 80’s 패션 용어 풀이
①빅 룩 Big Look 크고 넉넉함을 특징으로 하는 패션 스타일
②레그 오브 머튼 슬리브 Leg of Mutton Sleeve 소매 달림이 퍼프 슬리브처럼 부풀고 차차 좁아져 소맷부리에서는 꼭 맞게 된 소매. 마치 양의 다리와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③앙드레 김 한국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 1962년 12월, 첫 패션쇼를 개최하며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서 패션계에 데뷔한 이후, 당시 톱스타였던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것을 시작으로 은막 스타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남성 디자이너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도 개성 있는 디자인과 노력으로 의상디자인를 개척한 그는 1966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에서 패션쇼를 연 것을 시작으로 워싱턴, 뉴욕 등 세계 각지를 돌며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다.
④여피 Yuppies 고등교육을 받고, 도시 근교에 살며, 전문직에 종사해 고소득을 올리는 젊은이들을 뜻하는 말. 1980년대의 젊은 부자들을 상징한다. ‘여피’라는 단어는 젊고(Young), 도시적이며(Urban), 전문(Professional) 직종을 가졌다는 세 머리글자를 딴 ‘YUP’에서 유래했다.

Back to 90's Style 미니멀리즘 + 심플리즘
1990년대 세계 패션계는 ‘미니멀리즘’으로 압축된다. 우리나라는 전쟁 뒤 먹고살기 힘들었던 60, 70년대와 억눌렸던 80년대를 지나 경제성장이 절정에 치달았던 때다. 군부독재 시절이 끝나고 본격적인 민주주의가 시작되면서 치열했던 학생운동의 물결도 줄어들고, 전체를 향한 이익이나 사상보다는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좀 더 중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패션에 반영되며 ①미니멀리즘과 ②아방가르드가 공존하고, 힙합, 트래디셔널, ③그런지 룩 등 다양성이 공존했던 시대다. 캘빈 클라인, 도나 카란 등 심플한 디자인을 선보였던 미국 디자이너들의 미니멀한 슈트가 한동안 유행했다. 매니시한 슈트는 전통적인 초크 스트라이프로, 솔리드의 클래식 재킷은 통 넓은 바지나 미니스커트에 매치해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 동시에 일본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한 아방가르드 무드가 점차 확산되어 패션쇼에서 막 튀어나온 옷차림을 거리에서 만나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대두되면서, 디자이너 이신우는 ④에콜로지라는 테마로 콩으로 옷을 만들기도 했다. 스님들의 가사에서 영감을 받은 패치워크는 그런지 룩으로 고급스럽게 승화되어 유행했다. 머리는 앞머리를 올려 세우는 닭 볏 스타일에, 화장은 진했다. 톱스타 심은하, 김희선, 김혜수, 하희라 등 당시 20대였던 스타들이 유행을 선도했다.
올해 초에 개봉했던 영화 <건축학개론>과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90년대에 유행했던 주옥같은 노래들을 선곡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90년대는 아메리칸 스타일이 전 세계를 장악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하위문화라 할 수 있는 흑인들의 힙합 음악은 우리나라 가요사에 큰 전환점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유행했다. 서태지는 ‘문화 대통령’이라 불릴 만큼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들은 혁신적인 뮤지션임과 동시에 패션 이노베이터이기도 했다. 박시한 티셔츠에 곧 흘러내릴듯 힙에 걸치는, 통이 넓고 땅에 끌리는 듯한 긴 바지가 특징적이었다. 태그와 소매의 슬리브 라벨을 제거하지 않고 옷을 입는 등 젊은이들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트렌드를 추종했다. 두건을 머리에 두르거나, 수건을 바지 뒤에 꽂는 등 수많은 힙합 패션이 유행했다, 여자들은 배꼽티에 힙합 바지를 매치하기도 했다. 무엇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X세대’는 힙합은 물론 신승훈의 발라드, R&B 등 다양한 음악을 좋아했다.
‘폴로 스타일’로 대변되는 ⑤아메리칸 트래디셔널이 대중화되어 전형적인 대학생들의 패션으로 자리매김 했다. 폴로뿐 아니라 이를 벤치마킹한 브랜드 ‘빈폴’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스웨터나 셔츠를 어깨에 숄처럼 걸치거나 허리에 묶는 것이 유행했고, 다소 길이가 긴 셔츠와 블라우스의 앞자락을 하의에 집어 넣고 뒷자락은 빼는 스타일링도 크게 유행했다. 긴소매 티셔츠에 짧은 소매의 셔츠를 코디하는 등 미국의 믹스 앤 매치(Mix & Match) 코디법이 다양한 레이어드룩으로 표현되었다. 청바지는 이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베이식 아이템이 되었고, 게스와 닉스를 비롯한 다양한 청바지 브랜드들이 사랑받았다. 청바지나 청치마에 청재킷을 입는 등 청청 패션이 유행하기도 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들은 카디건, 청치마, 체크무늬 셔츠 등 우리와 가장 근접한 90년대 복고 의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90년대 초반에 중고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일본 만화 <슬램덩크>, 미국 농구 선수 마이클 조든이 몰고 온 NBA 열풍은 거리 패션까지 바꿔놓았다. 농구 선수의 유니폼에서 영감을 얻은 티셔츠와 블루종, 농구화가 크게 유행했는가 하면, 농구를 소재로 한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크게 인기를 끌어 드라마 주인공이었던 심은하와 장동건을 일약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90년대의 세계 패션계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군더더기 없고 심플한 그의 스타일이 시대사조와 잘 맞아떨어졌다는 평이다. 그는 내추럴하고 고급스런 소재로 남성복의 어깨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여성복에는 패드를 넣어 각이 지게 표현해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미국의 부자들은 독일제 차를 타고, 아르마니 슈트를 입는 것이 로망일 정도였다. 아르마니 슈트에 몸을 맞추려고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였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전히 큰 어깨의 품이 넉넉한 재킷에 펑퍼짐한 바지컷의 아메리칸 스타일을 입었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프라다 백팩’이 큰 인기를 누렸다. 가죽 가방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에 낙하산에나 쓰는 소재를 활용해 만든 백은 소재부터 독특했고, 캐주얼한 스타일에 가격도 싸지 않지만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백을 비롯해 샤넬, 구찌, 펜디 등의 핸드백을 갖는 것이 젊은 여성들의 로망이 되었고, 무수한 이미테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친절한 90’s 패션 용어 풀이
①미니멀리즘 Minimalism 최소한, 심플의 극치. 여분이 될 만한 것은 완전히 잘라내 심플하고 직선적인 실루엣의 옷이 여기에 해당된다.
②아방가르드 Avant-Garde 전위적인 패션. 패션쇼 등에서 선보일 법한 독특하고 기발한 스타일을 말한다. 대중보다는 셀러브리티 등 지극히 소수 그룹에서 공유되는 것으로, ‘톱 패션’이라고도 한다.
③그런지 룩 Grunge Look 낡아서 해진 듯한 의상으로 편안함과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는 패션스타일. 구속받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입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잘 반영해 실용적이고 감각 있는 젊은이들의 패션으로 탈바꿈하였다.
④에콜로지 Ecology 천연 소재를 주로 사용한 자연 지향적 룩의 총칭이다. 자연스러운 멋을 부각시키기 위해 천연섬유, 천연염료로 염색된 소재를 사용하고 자유스러움과 편안함, 활동성이 강조된다.
⑤아메리칸 트래디셔널 American Traditional 미국의 전통적인 신사복 모델.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전통적인 슈트 스타일을 말하며, 기본적인 신사복 스타일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스파용품
스파용품
H o m e S p a T h e r a p y

따뜻한 물속에서 온몸의 근육을 일깨워주고,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릴랙싱 홈 스파를 위한 조언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초와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배스 오일, 그리고 은은한 조명과 음악까지. 욕실이 재충전을 위한 공간으로 변신하면서 그와 함께 하루의 피로를 풀고 건강한 피부로 되돌려주는 홈 스파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몸과 마음의 휴식과 건강을 위한 재충전의 장’인 스파는 따뜻한 물에 들어가 푹 쉬면서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스트레스를 풀게 도와준다. 또한 물이 주는 놀라운 치유력으로 면역력을 개선해주고, 거칠어지는 환절기 피부를 탄력 있고 촉촉하게 해준다.
(위쪽) 자주 크리스탈 바스 솔트 피부를 촉촉하게 해주는 크리스털 솔트에 부드러운 꽃 향인 로즈 오일을 첨가해 만든 입욕제. 1만 1천9백원. 트릴로지 보태니컬 보디 워시 로즈힙과 오이 성분이 피부를 촉촉하게 해주는 수분 젤 타입의 클렌저. 500ml, 3만 9천원. 4711 아쿠아 콜로니아 레몬 & 진저 오 드 코롱 레몬 향이 활력을 전하는 아로마세러피 효과의 오 드 코롱. 170ml, 6만 2천원. 아쿠아 디 파르마 콜로니아 큐브 캔들 아로마 성분으로 심신을 안정시키는 핸드메이드 방식의 캔들. 1000g, 10만 5천원. 클라란스 토닉 바디 트리트먼트 오일 탄력 강화와 튼 살을 예방하는 100% 식물성 보디 트리트먼트 오일. 100ml, 6만 5천원. 나뛰렐 도리앙 프래그런스 디퓨저 by 온뜨레 오렌지꽃의 향기를 디퓨저로 즐길 수 있는 아로마세러피 기능의 홈 프레이그런스. 100ml, 4만 5천원.. 러쉬 체리드웬즈 콜드론 민감한 피부의 진정과 부드러운 스크럽 효과를 지닌 카카오 버터 성분의 배스 멜트. 80g, 1만 1천5백원.

혈액순환을 돕는 배스 타임
입욕할 때 물 온도는 체온보다 약간 높은 38~42℃ 정도가 적당하다. 물 온도가 낮으면 모공이 막혀 노폐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너무 높으면 피부 보호에 필요한 피지막까지 걷어내 피부를 건조하게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피로 해소에 효과적인 입욕 시간은 20분 정도가 좋은데, 건성피부는 15분 정도면 충분하다. 처음 5분 동안은 양손이 물 밖으로 나오게 해서 천천히 더운 열기가 몸의 위쪽으로 퍼지게 한 뒤 물에 완전히 잠기도록 한다. 입욕 중 물결이 생길 정도로 다리를 움직여주면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데 좋다. 다양한 종류의 입욕제를 사용하면 아로마의 편안함, 풍성한 거품 등 촉각과 후각, 시각까지 즐겁게 해주어 배스 타임이 지루하지 않다.
(아래쪽)러쉬 씽크 핑크 바닐라, 라벤더, 네롤리 성분이 피부를 매끄럽게 가꿔주는 입욕제. 90g, 6천1백원. 비오템 해초 모공 비누 모공, 각질, 피지 관리를 해주는 비누. 100g, 2만 5천원대. 닥터 브로너스 라벤더 퓨어 캐스틸 솝바 라벤더 에션셜 오일이 함유된 유기농 비누. 140g, 8천원. 이니스프리 홈스파 로맨틱 플라워 배스 솔트 피부를 향기롭고 매끈하게 가꿔주는 배스 솔트. 15g, 1천원. 샤넬 N.19 배쓰 앤 샤워 젤 순한 거품을 만들어주는 상쾌한 그린 노트, 파우더리한 아이리스 향의 포밍 샤워 젤. 200ml, 7만 6천원. 키엘 오렌지 플라워 & 리치 바디 클렌저 풍성한 거품이 부드럽고 깨끗하게 클렌징해주는 입욕제 겸용 아로마틱 블렌드 보디 클렌저. 250ml, 2만 9천원.
욕실 안 공기를 향기롭게 데우는 홈 스파의 시작
홈 스파의 효과를 높이려면 일단 목욕을 하기 전에 물이나 허브티 한 잔을 마신다. 물을 마셔두면 목욕 중 갈증을 방지하고 피부 건조도 예방할 수 있다. 보디 스크럽 제품으로 불필요한 각질을 제거하거나, 아로마 에센셜 오일로 경직된 부위를 마사지하는 것도 좋다. 레몬이나 라벤더 오일은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재스민과 샌달우드는 긴장과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을 준다.
(위쪽)오르비스 바디 고마쥬 에센스 인 스크럽이 피부의 각질을 제거한다. 150g, 1만 8천원. 크리니크 스파클 스킨 바디 엑스폴리에이팅 크림 풍부한 크림 타입으로 팔꿈치나 무릎 등 거친 부위에 사용한다. 250ml, 3만원. 버츠 비 허니 & 쉐어 슈가 스크럽 꿀과 시어 버터, 설탕 알갱이가 피부 각질을 제거해 촉촉하게 가꿔준다. 226.5g, 3만 7천원. 슈에무라 어린 녹차 클렌징 오일 칼 라거펠트와 콜라보레이션한 녹차 오일. 강력한 세정력과 풍부한 텍스처가 특징. 450ml, 9만 8천원대. 겐조 칠리 포밍 클렌저 피부의 노폐물을 말끔히 제거해주는 페이스 클렌저. 150ml, 3만 6천원. 자주 리프리빙디퓨져(쟈스민) 천연 아로마 에센셜 오일이 함유된 나뭇잎 모양의 리드스틱 디퓨저. 2만 3천9백원.

림프순환과 보습, 진정 효과의 마무리 스파
입욕 후에는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비로소 완벽한 홈 스파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스파가 끝난 뒤에는 모공이 열려 있기 때문에 피부 속 수분이 날아가기 쉬운 상태이므로, 보디 로션, 보디 크림 등을 사용해 피부에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고, 피부가 심하게 건조하다면 물기가 마르기 직전에 보디 오일을 발라 가볍게 전신을 마사지한다. 이때 손바닥, 종아리의 뭉친 근육을 누르면서 마사지를 해주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어 피로 해소는 물론 숙면을 취할 수 있다. 홈 스파를 시작하고 처음 일주일 정도는 같은 시간대에 같은 방법으로 스파를 반복해야 뇌가 릴랙스한 기분을 기억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음을 명심하자.
(아래쪽)롤리타 렘피카 퍼퓸드 벨벳 크림 아이리스에서 추출한 활성 성분이 피부의 수분, 활력, 윤기, 탄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300ml, 6만원. 끌레드뽀보떼 크렘므 르꽁스띠뛰앙뜨 뿌르 르 꼬르 촉촉하고 탄력 넘치는 보디라인을 완성해주는 풍부한 질감의 보디 크림. 200ml, 13만원. 닐스야드 래머디스 투 롤 해바라기씨 오일, 라벤더 오일 등이 함유된 아로마 롤온. 피부 곳곳에 문지르면 편안히 숙면을 취할 수 있다. 9ml, 1만 9천원. 헤라 글램 바디 리제너레이팅 오일 와인에서 얻어낸 폴리비놀 성분이 깊은 보습 효과와 피부 재생 촉진 효과를 준다. 120ml, 4만원. 시슬리 오 드 깡빠뉴 허브와 그린 토마토잎의 향을 담은 상쾌한 향의 부드러운 에멀전. 150ml, 8만 9천원.

※ 족욕과 수욕을 이용한 스파
입욕이 번거롭거나 욕조가 없을 경우는 족욕, 수욕의 스파를 해보자. 몸의 어느 부위든 꾸준하게 따뜻한 물로 덥히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입욕제, 아로마 오일, 소금 등을 넣고 입욕과 마찬가지로 15~20분 정도 손과 발을 덥힌다. 손발만 따뜻하게 해도 혈액이 잘 돌아 맥박이 높아지면서 빠른 시간 안에 피로를 풀 수 있다. 매일 오랜 시간 욕조에서 즐기는 입욕은 때로 피부에 과다한 수분을 공급해 피부가 건조해질 수 있으므로, 입욕과 족욕, 수욕을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홈 스파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스파용품
H&M 캠페인 컷, 베르사체 광고 비주얼
Fast Fashion 럭셔리의 날개를 달다

지금 패션계는 콜라보레이션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랜드마다 다투어 선보이는 콜라보레이션의 열정은 기그대 이상이다. 이 가운데 단연코 돋보이는 존재는 역시 H&M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콜라보레이션은 매번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경이로운 아이디어로 눈부시다. 장황한 설명은 필요 없다.

콜라보레이션의 새로운 바람
H&M(Hennes&Mauritz AB)은 1947년 스웨덴에서 설립된 SPA브랜드다. 여성복, 남성복, 영 캐주얼, 아동복, 액세서리까지 폭넓은 제품군을 선보이는 H&M은 프랜차이즈 마켓을 포함해 44개 마켓에서 전 세계 약 2천5백 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패션 기업이다.
SPA는 ‘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Brand’의 줄임 말로 의류 기획・디자인, 생산・제조, 유통・판매까지 전 과정을 제조 회사가 맡는 의류 전문점을 의미한다. 제조사가 상품을 직접 대량생산해 유통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은 제조 원가, 비용에서 거품을 뺐다. 그 혜택은 온전히 마켓으로 돌아가 소비자는 좀 더 저렴한 가격에 퀄리티 높은 옷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또 소비자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반영한 제품을 선보이면서 ‘패스트 패션’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점점 유행 주기가 빨라지고 소비자의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PSA브랜드가 패션계 판도를 바꾸는 데 기여한 공은 남다르다.
가파르게 상승하던 SPA 브랜드의 입지도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 적신호가 켜졌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로 패션계의 우울은 깊어 보였고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이 무렵 브랜드마다 불황을 이겨 낼 방편으로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마케팅 카드를 꺼내 들게 되었다. 그리고 H&M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콜라보레이션의 아이콘으로 안착했다.
사내 디자이너, 패턴 메이커, 바이어에 의해 창조되던 H&M의 컬렉션은 2004년 색다른 시도를 한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을 선언한 것. 이를 시작으로 로베르토 카발리, 스텔라 매카트니, 빅터 앤 롤프, 콤 데 가르송의 레이 가와쿠보, 지미 추, 매튜 윌리엄슨, 소니아 리키엘, 랑방의 알버 엘바즈, 베르사체 등 H&M은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작업하며 최대 이슈 메이커로 급부상했다. 더불어 대부분 완판이라는 A+ 성적표를 받으며 연일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동안의 콜라보레이션은 서로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와 일시적으로 팀을 이루는 작업이었다. 예컨대 브랜드는 건축가, 미술가, 셀러브리티 등에게 자신들의 제품을 의뢰하며 장식이나 컬러를 살짝 바꾸는, 즉 고유한 캐릭터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그 위에 ‘콜라보레이션’이라는 토핑을 약간 얹는 정도였다.
반면 H&M은 유명 디자이너, 명품 패션 하우스를 선택했다.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H&M은 브랜드에 새롭고 진취적인 입김을 불어넣고 퀄리티를 끌어올려 고급스럽게 업그레이드했다. 또한 H&M과 손을 잡은 명품 패션 하우스는 세계적인 장인의 손길이 묻어난 제품을 보다 착한 가격에 소개하고 자연스럽게 홍보했다.
결과적으로 H&M과 명품 패션 하우스는 서로의 개성과 장점을 부각시키는 윈-윈 전략으로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보았으며, 그들의 성공은 다른 브랜드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고 자극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H&M은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를 때론 수줍게 혹은 발랄한 이웃집 소녀처럼 친근하게 재해석해준다. H&M은 그들과 영감을 공유하면서 유쾌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이것이 마케팅, 홍보를 위한 수단이건, 브랜드 변화의 시작이건 보는 사람은 늘 흥분된다. 너무 흔해져 식상하다, 진부하다는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H&M의 콜라보레이션은 언제나 가슴을 달군다.
베르사체, AdR at H&M 컬렉션
베르사체, 착한 가격으로 만나다
H&M의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이 오픈되는 첫날 줄을 서서 매장에 입장한 쇼퍼에게 종종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뭔가에 홀려서 가방에 주워 담은 것 같다고. ‘싼’ 가격에 명품을 구입할 수 있는 건 행운이자 누구나 꿈꾸는 로망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가장 돋보이는 H&M의 콜라보레이션은 베르사체와의 작업이다. 베르사체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블랙에 블링블링한 골드 장식, 반짝거리는 새틴과 절제된 노출이 돋보이는 아이템들은 사랑스럽다. ‘베르사체’라는 네임 태그를 달고 있는 이 시크한 아이템들을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는 일은 흔치 않다.
심플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좀 과하다 싶은 글래머러스한 옷들이 살짝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리미티드라는 ‘한정판’이 가지는 소장 가치는 충분했다. 패션뿐 아니라 홈 웨어까지 선보인 H&M의 베르사체 콜라보레이션은 더할 수 없이 완벽했다.
H&M과 베르사체의 장점과 감성이 적절히 녹아든 콜라보레이션은 쉽사리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지난겨울 시즌의 콜라보레이션이 대 성공을 거둔 뒤, 베르사체는 또다시 H&M과 손잡고 2012년 여름 크루즈 라인을 캣워크에 올렸다. 역시 한정 판매, 그리고 온라인에서만 독점 주문하는 방식이었다. 이번에도 컬렉션에서 보여주는 비키니만큼이나 아주 ‘핫’한 반응을 일으키며 서버가 다운됐다. H&M을 통해서 보여주는 베르사체의 팬 서비스는 늘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든다.

마르니, 론칭 첫날부터 품절
이탈리아 브랜드 마르니는 독특한 프린트와 독창성으로 잘 알려진, 패션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패션 하우스 중 하나이다. 마르니는 설립 때 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가업 체계를 유지하며 전 세계 각지에 매장을 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해왔다. 마르니는 프린트나 컷, 실루엣 등에 있어 항상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으로 자신만의 트렌드를 정립해왔다.
설립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콘수엘로 카스티글리오니는 H&M을 위해 마르니 브랜드의 정수를 담아 H&M 컬렉션을 창조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H&M과 마르니의 만남은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그들의 콜라보레이션이 베일을 벗는 오픈 첫날부터 시작된 매진 행진은 연일 계속됐다.
마르니의 컬렉션은 마르니 특유의 자유로움과 실험 정신을 어김없이 드러내면서도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H&M의 특성을 적절히 녹여냈다. 대담한 아프리카풍 프린트를 모던한 바우하우스 스타일에 매치시키는가 하면 스포티한 실루엣을 페미닌한 라인과 접목하는 등 서로 다른 영역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아이템들은 패션 피플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르니는 H&M과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시그너처 소재와 프린트를 사용한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사랑받았던 아이템들을 모두 되돌아봤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마르니 스타일의 의상을 만들었다. 첫날부터 품절을 기록한 마르니와의 콜라보레이션은 이제 업계의 전설로 남을지 모른다.
안나 델로 루소, 또 다른 도전
2012 시즌 가장 핫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안나 델로 루소.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보그> 이탈리아판 편집장을 거쳐 현재 일본판 <보그> 편집장으로 있다. 안나의 화려한 의상은 스타일 아이콘으로서 끊임없이 주목받는다. 그녀는 패션 잡지와 패션계 트렌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더러 전 세계 패션 블로거들의 뮤즈이다.
H&M이 패션 디렉터와 콜라보레이션하는 것은 안나가 처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와의 콜라보레이션은 패션 역사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안나 역시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H&M과 함께 스페셜 액세서리 컬렉션에 그녀만의 유니크한 감각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액세서리 디자인은 ‘맥시멀리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안나의 스타일을 따라 화려하고 풍성하며 큼직했다. 오버사이즈에서 감도는 촌스러움도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디자이너 작품이 아닌’이라는 편견은 ‘신선한 매력’이라는 결과물로 우려 섞인 시선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H&M이 흥미진진하게 준비했던 안나 델로 루소와의 이벤트는 대담함, 판타지, 장식성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대단히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 디자이너가 아닌 패션 디렉터에게 콜라보레이션을 맡긴 것은 H&M의 탁월한 안목과 과감한 취향, 무엇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올 시즌 마지막,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
2012년 대미를 장식할 H&M 콜라보레이션의 대상이 과연 누구인가를 두고, 항간엔 수많은 루머가 돌았다. 시작 전부터 화제를 불러 모았던 이번 시즌 마지막 콜라보레이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
H&M이 마르지엘라와의 콜라보레이션을 공식화했을 때 사람들의 이목은 집중되었다. 마르틴 마르지엘라는 전위예술가 출신의 디자이너로 반 미학적이면서 해체주의가 깃든 독특한 제품을 주로 선보였다. 사람들은 과연 H&M이 마르지엘라의 독특함을 어떻게 녹여낼지에 주목한다.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는 지난 30년 동안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패션 하우스의 하나로 자리매김해왔다. 그의 컬렉션은 패션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원형의 해체와 변형에 대한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해왔다. 부피에 대한 재해석, 형태의 변경, 옷의 용도와 움직임에 대한 변화를 통해 패션에 대한 기존 관념을 뛰어넘는다. 그는 미니멀리즘과 심플함을 토대로 독특한 디자인을 펼치고 있다.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 패션 하우스는 개개인이 아닌 팀으로 활동하면서 창의성에 기반을 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이 브랜드가 보여주는 콜라보레이션은 과연 어떨까. 늘 그렇듯 서로 다른 프린트와 컬러를 매치시키고, 모던한 트라이블 디자인에 바우하우스 그래픽을 믹스한다고 브랜드 관계자는 귀띔한다. 여기에 스포티하고 실용적인 면모까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만큼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다.
파리의 아방가르드한 감성을 담은 마르지엘라의 작품은 오는 11월 15일 H&M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H&M 콜라보레이션의 다음 행보가 그려낼 새로운 패션의 역사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김범수 아나운서
막걸리
Oldies but Goo dies

온갖 것들이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요즘, 방송인이자 공연·전시 기획자 김범수의 라이프스타일은 슬로 슬로 고 고(slow slow go go)다. 이런 그가 좋아하는 술은 막걸리이다. 오랜 시간 발효돼야 제대로 맛이 나는 막걸리와 느린 템포의 삶이 주는 여유로움이 만나는 곳. 거기에 김범수 그가 있었다.

오래되고 소박한 게 좋다
약속 장소에 들어선 김범수는 훈훈한 미소에 악수를 청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이곳에 오면 늘 앉는 좌석이 있다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지정석은 가장 오픈된 곳이라 할 수 있는 테라스 앞 테이블이다. 그에게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을 하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젓는다.
지하 1층에 있는 퓨전 막걸리 바, 마크홀릭은 숍 입구와 나란히 이어지는 벽을 허물고 넓은 테라스 창을 만들었다. 폴딩식 창문을 열면 야외 데크로 연결되는데 지하이기에 더욱 독특하게 다가오는 구조다. 그래서 지하임에도 답답하거나 음침하지 않다. 막걸리를 마시는 술집 하면 떠올리게 되는 주점 분위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련된 와인 바 같은 모던한 인테리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곳 오너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사장님이란 호칭 대신 ‘형’이라 불러요. 제가 원래 술을 잘 못하는데요, 여기만 오면 은근히 많이 마시게 돼요. 친근하고 편해서 그런가 봅니다(웃음).”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새빨개지고 서서히 심장박동 소리도 빨라진다. 그는 결코 과음을 할 수 없는, 알코올 분해 능력이 떨어지는 체질이다. 이런 그가 이곳에만 오면 무장해제되어 만취한 적까지 있다. 김범수는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술잔이 돌아가며 점점 무르익는 화기애애한 무드가 좋아 술자리를 가진다.
“술맛도 좋고, 특히 여기서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아서 그런거 같아요. 정말 가까운 지인들이나 외국 친구들과 함께하는데 매번 유쾌합니다. 오래된 술 덕분인지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길어집니다.”
막걸리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술이다. 찹쌀·멥쌀·보리 등을 찐 다음 수분을 건조시킨다. 이것을 지에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누룩과 물을 섞고 일정한 온도에서 발효시킨 것을 떠내지 않고 그대로 걸러 짜낸다. 6~7도로 알코올 성분이 적은 막걸리는 곡식을 주원료로 하여 곡주(穀酒), 빛깔이 쌀뜨물처럼 희고 탁해서 탁주(濁酒)라고도 한다.
김범수는 아나운서 시절 딱딱한 뉴스보다 문화, 교양, 예능 프로그램을 두루 진행한 터라 트렌디한 이미지가 강하다. 옷을 입는 스타일도 댄디하다. 더불어 요즘 하고 있는 공연, 전시 기획일까지 진취적이다. 그래서인지 근사하게 앞서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반면 막걸리는 그보다는 멀찌감치 뒤에 있다. 둘은 어쩐지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사이인 것만 같다. 이런 게 편견이고 오해일까.
“프렌치 레스토랑만 갈 것 같다는 얘기 좀 듣습니다(웃음). 하지만 그런 곳은 잘 몰라요.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더 좋아해요. 점점 소박한 것에 끌립니다. 사람도 그렇고, 음식, 술도 그래요. 물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샴페인이나 와인을 더 즐겨 마신 적이 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막걸리에 완전히 정착했어요.”
솔직히 술맛을 잘 모른다. 근데 요즘 즐겨 마시는 검은깨 막걸리나 홍초 막걸리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특별히 감탄할 맛은 아니지만, 확실히 끌리는 게 있다. 검은깨 막걸리는 한 모금 삼키고 나도 고소함이 한참이나 입안을 감돈다. 홍초 막걸리는 이와는 정반대다. 살짝 씁쓸한 것 같으면서 시큼하기도 하고 달짝지근하다. 요컨대 홍초 와 비슷하지만, 막걸리를 만나서 그 맛이 참 오묘하다. 무엇보다 검은깨나 홍초 걸리는 막걸리 특유의 누룩 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 그리고 텁텁하지 않고 깔끔해서 더 좋다.
“검은깨, 홍초 모두 건강에 좋은 식재료잖아요. 외국인 친구들에게 건강에 좋다는 얘기를 해줬더니 모두 저를 따라 검은깨, 홍초 막걸리만 마셔요(웃음).

세 번의 터닝포인트
흔히들 막걸리는 단맛·신맛·쓴맛·떫은맛이 잘 어울리고 감칠맛과 시원한 맛이 난다고 한다. 김범수의 행로도 이런 막걸리 한잔과 닮은 듯하다.
지금까지 그에게 세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4명의 지인들과 모 기업의 영상 사업단을 해외에 매각하는 일을 했다. 6개월을 김밥과 자장면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M&A 프로젝팅에 에너지를 쏟았다. 내일이면 계약서에 사인한다는 통보까지 받았는데, 갑자기 일이 하룻밤 사이에 백지화됐다.
“저 같은 경우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마시는 술과 장소가 달라지는데요. 그때 프로젝트를 함께한 팀원들과는 소주를 마십니다. 대학 동기들과도 여태 모임을 하는데, 그 모임은 삼겹살에 소맥이에요.”
영상 사업단 매각 프로젝트를 하면서 방송에 관심을 갖게 됐고, 서른셋 늦은 나이에 아나운서에 입문하였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 만약 그때 아나운서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전공을 살려 통상이나 재무 분야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고 한다. 두 번째 터닝포인트는 2011년 새해 겨울, 샤갈 전시회를 하면서 TV 프로그램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한 때이다.
사람들이 “<라디오스타>를 보면서 김범수가 프리랜서 아나운서네? 이혼도 했었네? 문화 기획도 해? 하는 반응들… 저를 보는 새로운 시각들이 생겼다고 할까요. 바로잡아주는 부분도 생겼고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아직도 방송국 직원이라고 생각했고, 문화 기획자가 된 것도 몰랐어요.”
자신에 대해 비교적 솔직히 드러내니 세상을 보는 시각도, 사람을 대하는 법도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한다. 2004년 SBS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독립한 김범수는 2008년부터 문화 콘텐츠 회사 ‘코바나컨텐츠’에서 공연·전시 기획자로 행동반경을 넓혔다. 그는 방송국에 있을 때 <접속 무비월드>, <금요 컬처 클럽> 등 문화 예술 관련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경험으로 미술 전시·뮤지컬 공연 사업 등을 펼치고 있는 코바나컨텐츠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2009년 앤디 워홀전, 2010년 12월 샤갈전, 2011년 뮤지컬 <미스 사이공> 등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단순히 전시나 공연의 기획 일만 하진 않는다. 브랜드 포지셔닝부터 홍보, 마케팅, 심지어 전시장 도슨트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무조건 현장으로 달려갔고 직접 나서서 일했다. 일례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할 때는 공연을 스무 번이나 봤다. 그것도 매회 다른 좌석에 앉아서. 어느 날은 VIP석에서 보고, 또 다음 날은 맨 뒤에서, 그 다음 날은 앞줄에서 봤다. 볼 때마다 의상, 음향, 조명이 달리 보였다. 그러다 보니 관객, 스태프, 프로듀서, 기획자 입장에서 공연이나 전시의 장단점이 보였다. 또 전시회를 할 때는 오디오 가이드북을 직접
녹음하고, 도록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그림, 홍보 문구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폈다.
이렇게 하면서 꽤 까다로운 일을 아주 순수하게 즐기는 법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어 새로운 가르침도 얻었다. “사진작가 마크 리부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세 번째 터닝포인트를 맞았어요. 이젠 알에서 깨어난 기분입니다. 내면의 깊이, 순수함은 곧 그 사람의 저력, 품격이에요. 마크 리부를 만나면서 제 인생관에도 변화가 생겼죠. 겸손, 애정, 기대, 격려가 주는 기쁨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감과 소통의 소중 함도요.”

사진 읽어주는 남자
요즘 김범수가 흠뻑 취해 있는 대상은 프랑스 사진작가 마크 리부이다. 리부는 철강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공대에 진학하고 공장의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세계 여행과 사진에 대한 열정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러던 1951년 어느날, 당시 최고의 사진작가였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만나게 되면서 르네상스의 회화주의 구성법을 익히고 매그넘의 초창기 멤버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찍은 ‘에펠탑의 페인트공’ 사진이 당시 최고 권위의 잡지 지에 실리게 되었다. 안전 장치 하나 없이 에펠탑에 페인트칠을 하는 위험천만한 페인트공의 모습은 마치 평화롭게 춤추는 곡예사를 닮았다. 이 사진은 마크 리부가 저널리스트로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사진 인구가 무척 증가했잖아요. 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이, 명품 사진을 소개할 적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진이 좋을지 고민하던 중에 지인에게서 마크 리부를 소개 받았어요.”
지난 5월 26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렸던 <에펠탑의 페인트공-마크 리부 사진전>은 마크 리부의 첫 한국전으로 그의 대표작 ‘에펠탑의 페인트공’(1953)과 ‘꽃을 든 여인’(1967) 등 1백90점을 선보였다. 현재 대구사진비엔날레를 통해 롱런 준비를 마친 상태. 11월부터 일산 킨텍스로 자리를 옮겨 겨울방학 전시 계획이 잡혀 있다.
김범수는 확신을 갖고 마크 리부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너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전당 전시회 중반부터 직접 도슨트를 맡아 하루에 서너 차례 관객과 호흡했다. 도슨트 김범수가 등장하면서 사진전은 SNS를 타고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덕분에 전시회도 후반으로 갈수록 성황을 이뤘고, 준비했던 사진 도록 3천 부 모두 매진되었다.
“도슨트를 하면서 관객들의 진심이 느껴졌어요. 함께 공감하고 소통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마크 리부를 통해 세상, 사람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법을 알았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또 다른 소통과 공감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11월 오픈 예정으로 예술의전당에서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고흐전은 꽤 오랫동안 준비한 전시회이다. 그는 책상에만 앉아
있지 않고 직접 유럽으로 날아가 더 좋은 고흐 그림을 골랐다. 그래서 고흐의 흔적을 찾아 네덜란드, 프랑스를 돌았다. 고흐의 고향에 도착했던 날,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왜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릴 수 있었는지, 바로 알게 됐어요. 밤하늘에 별이 하얗게 쏟아지더라고요. 그처럼 하늘에서 많은 별을 본 건 고흐 고향이 처음이었어요.”
작가를 알고 느끼는 만큼 대중에게 그 감동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지난 9월 워싱톤 D.C에서 한미수교 120주년 기념 행사 진행을 맡았었다. 정부와 정부가 주관하는, 굉장히 오피셜하고 프라이빗한 행사에서 영어 사회를 봤다. 스스로가 굉장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이것도 작은 성공이라 고 할 수 있겠죠?(웃음)”
이를 계기로 그의 로망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지금은 다른 나라 문화를 우리나라에 소개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고. 그리고 자신의 꿈과 많은 이야기를 공유 할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도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는 소망도.
“결혼, 해야죠.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분위기를 즐기고, 대화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이에요.”
웰 에듀케이션, 웰 그로우 업. 그저 많이 배우기보다 바르게 배워왔고, 아름답기보다 바르게 잘 성장해 온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고흐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프랑스를 돌아 다녔는데요, 혼자 보기에는 못 견디게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는 것도 제 소박한 바람이에요.”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고 싶은 술도 생겼다. 보르도 와인.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 편하고 부담 없는 술이다.
“언젠가 대모산에 계신 무량 스님을 뵌 적이 있어요. 추운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니시더라고요. 소년의 얼굴을 하고요. 거추장스럽게 꾸미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인생의 진리는 단순해요.”
지금 이대로가 좋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설렘도 있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적어도 지금이 김범수에게 그렇게 여겨진다.